시몬 베유&일에 대하여

시몬 베유 <노동의 신비> 번역(1)

빨간차무다리아줌 2020. 10. 7. 17:37

노동이란 돈을 버는 것이라고 그런 일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바라보니 나의 매일매일의 수고는 그 어느 것도 생산적이지 않았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전환시켜준 글이 바로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중력과 은총>> 중 <노동의 신비>라는 글이었다. 2년이 지나 문득 책을 들춰 같은 부분을 읽어 보았는데 이런 글이었던가 싶어 원문을 찾아 보았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가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번역가들의 노고가 무색하게 뚝뚝 연결이 끊어졌다. 내가 이해해 보자고 이 꼭지를 번역하고 있다. 번역은 반역이라고, 얼핏본 세계와 시간을 들여 보는 세계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아, 아, 내 머리를 깨뜨리고 싶다. (제사 준비를 앞두고 주기도문을 외듯이 글을 곱씹어 본다.)

 

노동의 신비

 

인간 조건의 비밀은 바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여러 힘 사이에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자연은 인간을 한없이 추월한다. 오직 인간의 행동속에만 균형이 존재한다. 인간은 노동 속에서 행동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재창조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언제나 자기 삶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재창조하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을 벼려 만들기.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적 자기 존재를 생산한다. 학문을 통해서 상징을 수단으로 우주를 재창조한다.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결합을 재창조한다 (외팔리노스의 연설 참조). 노동, 학문, 예술 이 세 가지는 다른 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따로 떼어 놓는다면, 별볼일 없고 공허하며 헛된 것이다. 이 셋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노동자 문화이다.(언제나 기다려야 하리라)

 

플라톤 자신은 한 명의 선구자일 뿐이다. 그리스인들은 예술과 스포츠를 알았다. 하지만 노동은 알지 못했다. 노예가 주인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다.

 

해야 할 일 두 가지

기계에 개별성을 부여할 것.

학문에 개별성을 부여할 것(대중화, 직업의 기초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식 교육을 하는 민중대학)

 

육체노동. 어째서 노동 혐오의 방식에 대해 쓴 신비주의자 농부나 노동자 한 사람이 없을까? 노동에서 혐오는 너무나 흔하고 언제나 위협적이어서 영혼은 식물처럼 꼼짝없이 이를 외면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혐오를 인정하는 데는 죽음의 위험이 존재한다. 이것이 민중에게 고유한 기만의 근원이다. (계층마다 고유한 기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혐오는 시간이 지우는 짐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다면 상승할 수 있다.

온갖 형태의 혐오는 비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귀한 것으로 인간이 밟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된다. 나는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혐오를 온전히 자신의 혐오로 바꾸기.

 

단조로움은 무엇보다 아름답거나 아니면 무엇보다 끔찍한 것이다. 그것이 영원성의 반영이라면 무엇보다 아름답다. 아무 변화 없는 계속성을 가리킨다면 무엇보다 끔찍한 것이다. 초월적 시간이거나 불모의 시간이거나.

원은 아름다운 단조로움을 상징한다. 시계추의 움직임은 잔혹한 단조로움의 상징이다.

 

노동의 영성. 노동은 궁극의 목적이 공처럼 튀어 돌아오곤 하는 현상을 고단하게 체험하도록 해준다. 먹기 위해서 일하고 일하기 위해서 먹고 둘 중 하나를 목적으로 보거나 각각을 따로 떼어 놓는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순환 속에 진리가 있다.

챗바퀴 도는 다람쥐와 천체의 회전. 극단적으로 비참하지만 동시에 궁극의 위대함이 있다.

인간이 챗바퀴를 도는 다람쥐임을 알고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다면 구원이 가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