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23.

빨간차무다리아줌 2024. 3. 27. 20:38

내가 북토크를 한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 전엔 딱히 북토크라기보다 브르통을 공부하면서 알게된 초현실적 유희... 그런 걸 흉내 내보고 싶었다. 유명하고 멋진 작가가 아니더라도 혼자가 아닌 둘, 혹은 셋이서 어쩌면 네, 다섯이서 같이 놀아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면서. 멋 모르는 꼬마 아이들이랑 해볼 수도 있을 텐데. 아니, 오히려 애들은 재미 없어 할려나.  MBTI 성격 유형 INFP인 나는 '나'에 대하여 한참을 들여다 보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일기Journal du dehors>>라는 제목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9쪽 내가 장면에 끼어들거나 각 텍스트의 기원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가능한 한 피했다. 오히려 사진을 찍듯 실재를 기술하는 글쓰기를 실천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러면 안에서 마주친 존재들은 그들의 불투명성과 수수께끼를 간직하지 않을까.

10쪽  하지만 결국, 텍스트 안에 예상보다 훨씬 많이 자신을 투영했다. 텍스트에 새겨 넣을 말과 장면의 선택을 무의식에서 결정하는 강박과 기억에 의해. 이제, 내면일기 --- 2세기 전에 탄생한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반드시 영원하진 않다 --- 쓰면서 자아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확신이 선다.바로 전철이나 대기실에서 스쳐 가는 이름 모를 타인들이 흥미나 분노 혹은 수치로 우리를 뚫고 지나가며,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 기억을 일깨우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드러내어 준다.

에르노가 '사진을 찍듯 기술하는 글쓰기를 실천'하며 거기에 투영된 '나 자신'을 발견하듯 나도 그의 글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발견하는 '나' 모먼트가 있다. 

65쪽  르클레르에서 장을 보는데 <부아야주>가 들려온다. 느끼는 감흥과 즐거움과 노래가 끝날까봐 느끼는 불안감에는, 파베세의 <아름다운 여름> 혹은 <성역> 같은 책들이 내게 불러 일으켰던 격렬한 느낌과 공통점이 있다. 디자이얼리스의 노래가 촉발한 감정은 날카롭고 거의 고통스러우며 반복해도 채워지지 않는(예전에는 음반을 번이고 다섯 번이고 번이고 같에 연달아 들으며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렸다)불만족이다.책의 경우, 많은 해방, 많은 탈주, 많은 욕망의 해소가 일어난다. 노래(가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가락이 중요한데, 그래서 나는 플래터스나 비틀스의 노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햇다) 경우, 욕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장소도 장면도 인물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뿐. 하지만 어쩌면 삶의 시기 전부가, 30 <아임 저스트 어나더 댄싱 파트너> 들려올 과거의 나였던 소녀가 세차게 밀려들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거칢과 모자람 때문이리라. 반면에 다시 읽은 <아름다운 여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풍성함과 아름다움은 결코 나의 삶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85쪽 푸아소니에르역에서 내렸고 라 파예트가를 따라 올라 생배상드폴 성당까지 갔다.계단을 올라가면 성당이다. 젊은 여성 명이 돌계단에 앉아 햇볕을 쬐며 편지를 썼다. 남녀가 키스했다. 마치 로마에서, 태양을 향해 꽃으로 가득한 계단을 올라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으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마쟁타 대로로 접어들어 예전 호텔 스팽크스가 있던 곳인 106번지의 호텔 쉬에드를 찾았다. 건물 전면에 덮개를 씌워 놓고 층마다 내부를 부수고 있었다. 일꾼 명이 창가에 팔을 괴고 다르 사람들에게 웃어 가며 뭔가를 말하면서 나를 지켜봤다. 나는 호텔(아마도 아파트로 개조 중인) 올려다보면서 맞은편 거리에 꼼짝 않고 있었다. 그는 내가 사랑이든 불륜이든 기억의 장소로 되돌아온 거라고 생각했을 . 나는 다르여자, 나자, 1927년경이 호텔에 살았던 앙드레 브르통의 여자에 대한 기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내가 멈춰 진열창에는 유행지난 신발들이 진열되어 잇었고 하나같이 검은색이었는데, 실내화 역시 검은색이었다. 마치 장례용 혹은 성직자용 신발 전문점 같은 느낌이었다. 뒤로 계속 마쟁타 대로를 따라 내려가다 페름생라자르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인적이 없었다. 남자 명이 문간에 낮아 있었다. 포석에 찌꺼기처럼 남은 피의 흔적. 다시 파예트가로 접어들어서 옛날식으로 커튼을 카페 <누벨 프랑스>까지 갔다. 바로 문간에서 어떤 사내가 거리 맞은편의 유라시아 여성에게 손짓을 보냈다. 나는 멍하니 나자의 발걸음을 쫓아 결었는데, 일종의 마비 상태는 강렬한 체험의 느낌을 준다. (1987년의 아니 2014년의 은정)

98 쪽 전철 안에서, 젊은 남녀가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격렬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껴안기를 번갈아 한다.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때때로 사람은 도전적으로 승객들을 바라본다. 소름 돋는 느낌. 문학이 내게는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든다.

 102쪽 자그마하고 적갈생 곱슬머리인 <작가>는 보부르(퐁피두 센터) 근처 서점의 지하 저장고 벽에 기대어 서 있다.옆에 있던 편집자가 작가를 소개하며 그녀의 용기를 언급한다. 이번에는 작가가 발언하는데, 보라색 숄을 두르고 팔뚝에 팔찌를 차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반지를 꼈다. 아주 감수성이 예민 여성. <글을 쓴다는 , 그것은 실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철저한 사회적 고독의 제물인 저주받은 작가를 한참을 연기해 가며 말한다. 손에 로컬 포도주를 잔을 들고 그녀 주위로 반원을 그리며 둘러선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끄덕인다. 당연히 어떤 동정도 없는 것이, 철저한 고독은 고독이 아님을 --- 현실의 고독은 그려 말이 없으며,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자신들 역시 <실추> 있으면, 다시 말해 글을 있으면 좋겠음을 알고 있기에. 작가 역시 그것을,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함을 안다.사람들의 뇌리 안쪽에서 진실은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