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 놓은 보물을 찾으세요,장영희
아침 햇살에 씩씩하게 잘 자라네 달개비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데워 손에 들고 자기소개서를 써봐야지
커피 한 모금에 창밖 하늘을 본 것이 잘못이야
아 물감을 찍기 시작한 것이 잘못이야
책을 펼쳐 든 것이 잘못이야
소리 내 읽다 울컥 울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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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 놓은 보물을 찾으세요,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샘터사, 2010 중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하거나 죽은 이라크 민간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머리가 으깨진 채 숨진 남자, 부모와 양팔을 한꺼번에 잃은 아기, 화상 때문에 괴기한 모습으로 변한 여자, 두 발목이 너덜거리는 소녀, .......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거창한 명분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어떻게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저렇게 참혹하게 파괴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잔혹성, 난폭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오늘따라 문학관 입구에 붙어 있는 광고문 중 '동문회에 안 나오면 오늘이 제삿날', 'MT에 불참하는 자를 축출하자' 등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문구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한구석에 붙은 광고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숨겨진 보석을 찾아서, 숨겨진 눈물을 찾아서, 숨겨진 진리를 찾아서...... 혜명회로 오십시오.'
교내 불교 동아리가 회원 모집을 위해 내붙인 광고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마음의 보석도, 눈물도, 진리고 모두 숨어 있다는 전제가 담긴 이 광고문에서 '숨겨진 눈물을 찾아서'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문득 오래 전에 미국에서 만났던 킹 부인이 생각났다. 친구의 이웃이었는데 갑자기 좀 와달라는 전갈이 왔다. 한국 고아를 입양해 사회복지소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날인데 낯선 땅에 와서 푸른 눈의 엄마를 처음 상면하는 자리에 같은 한국인이 있어 한국말을 좀 해줄 수 있다면 아이의 충격이 훨씬 덜하리라는 배려에서였다.
킹 씨 집에 도착했을 때 킹 부부는 집 안 군데군데 꽃과 동물 인형들을 배치하며 제이슨 - 그들이 지어놓은 아이의 이름 -을 맞이할 채비로 분주했다.
마침내 사회복지소 직원이 두 살 난 제이슨을 안고 들어 올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한 뇌성마비로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고 한쪽 눈까지 먼,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였다. 아이를 받아 안고 한참 동안 아이를 내려다보던 킹 부인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당황했다. 아이의 상태로 보아 그녀가 실망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제이슨을 꼭 보듬어 안으며 하는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정말 예쁘군요. 이렇게 예쁜 아기가 어떻게 내 아이가 되었을까요. 내가 운이 너무 좋지요?"
지난해 다시 제이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제 거의 열 살이 된 제이슨은 엄마 뒤에서 나를 열심히 훔쳐보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 제이슨을 처음 보고 우는 모습에 당황했었다고 말하자 킹 부인이 대답했다.
"제이슨은 지금도 늘 나를 울게 만들지요. 어제도 포크를 여러 번 떨어뜨리면서도 혼자 식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대견해 울었답니다. 저는 눈물은 사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이슨은 제게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킹 부인의 말처럼 사랑이란 결국 아주 쉽고 단순한 감정 - 불쌍하고 약한 자를 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마음 - 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 전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했겠지만, 어쩌면 눈물은 사랑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Le Petit Prince》(1943)를 쓴 생텍쥐페리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부富"라고 했다.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눈물을 찾아 마음의 부자가 된다면 이 찬란한 봄에 맞는 부활의 아침이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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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교수는 영문학자였다.
나는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 전공했다고 하기 창피한 실력이지만.
프랑스 문학을 배우며 동경했던 서구는
윗글의 킹부인과 같은 삶의 태도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 사회가 도달해야할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선진국이 되어 버렸다며 자랑하지만
우리가 동경하던 서구 선진 사회에 대해 무척 실망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우리들 거북이는 자고 있는 토끼를 지나
최종 목적지를 잊지 않고 앞으로 느리게 향해 나아가야겠지.
그걸 나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