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일에 대하여

진실, <뿌리내림>, 시몬 베유 지음;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2013 중 '영혼의 욕구'에서

빨간차무다리아줌 2020. 11. 29. 16:42

책을 다 배낄 거냐고? 그렇진 않지, 물론. 하지만 내가 그녀의 글을 논하고 평하고 인용할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읽어지는 번역의 글이라면 간직해 거듭 생각해보는 것밖에는 없음으로 짧은 글은 그대로 옮겨 놓아본다. 1943년의 글이 2020년에도 울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진실

진실에 대한 욕구는 그 어떤 욕구보다 신성하다. 하지만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지극히 명망 높은 작가들의 책에서조차 얼마나 엄청난 거짓들이 뻔뻔하게 펼쳐지는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기가 두려울 것이다. 그런 때에는 책을 읽어도 찜찜한 우물에서 길어 온 물을 마시는 것 같다. 

하루 여떫 시간씩 일하고도 저녁마다 배움을 얻고자 책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형 도서관에 자료 출처를 확인해 보러 갈 형편이 못된다. 그들은 그냥 책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가짜 양식을 먹으라고 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작가들은 선의에서 그랬을 뿐이라는 옹호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들은 하루 여덟 시간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 사회는 작가들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수고를 들여 과오를 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부양해 준다(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물론이고 번역의 경우도 충분히 연구하고 깊이 사고해서 오류를 최대한 바로잡아 출간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없다). 선로 변경수가 열차 탈선 사고를 내고서 선의에서 그랬다고 변명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협력자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신문, 그런 신문이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참아 넘긴다면 그래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대중은 신문을 경계하지만 그러한 경계심이 대중을 보호하지는 않는다. 대중도 어느 한 신문에는 진실과 거짓 모두가 있다는 것을 대충은 알고 뉴스들을 그 둘로 나눈답시고 나누지만, 결국 본인의 선호에 따라 무턱대고 분류할 뿐이다. 이리하여 대중 역시 오류에 빠진다. 

모두가 알다시피, 조직적인 거짓과 구분되지 않는 저널리즘은 범죄다. 하지만 그런 범죄는 처벌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일단 범죄로 인정되었는데도 그러한 활동을 처벌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도대체 뭘까? 처벌 불가능한 범죄라는 이 괴상한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법의 정신이 가장 흉측하게 왜곡된 결과 중 하나라고 하겠다. 

분별 가능한 범죄는 모두 다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고, 기회가 닿는 한 모든 범죄를 처벌하기로 결의하자고 부르짖어야 할 때는 아닐까?

공중위생 차원의 몇 가지 조처들이 진실에 대한 침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보호 차원에서, 일단 상당한 영향력을 인정받는 특수한 법정들과 특별히 선택되고 양성된 법관들의 존재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이들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오류들을 공식적으로 단죄하는 책임을 맡는다. 또한, 악의가 있음이 입증되었거나 같은 오류를 자주 반복하는 죄인에 대해서는 금고형이나 징역형까지도 선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고대 그리스 문화 애호가가 마리탱의 신간에서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노예제도를 비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라는 글을 읽었다 치자. 마리탱은 앞에서 말한 특수한 법정에 기소당할 것이다. 그리스 문화 애호가는 우리 시대까지 전해 오는 옛 글 가운데 노예제도를 다룬 가장 중요한 글,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만을 들고 갈 것이다. 그리고 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게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노예제도가 자연과 이성에 절대적으로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어떤 이들'이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 축에는 끼지 못한다고 볼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음을 주지시킬 것이다. 법정은 마리탱에게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 문명 전체를 심히 욕되게 하는 거짓 주장을 손쉽게 검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낸 것에 대해 유죄를 선고할 것이다. 모든 일간지, 주간지, 잡지, 라디오 방송 등은 이 판결을 대중에게 고지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마리탱 측의 답변까지도 의무적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거짓을 함부로 활자화하기가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그랭구아르>지1)가 어느 스페인 무정부주의자의 연설이라면서 전문을 게재했던 때가 있었다. 그 당사자는 파리의 한 집회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막판에 사정이 생겨 스페인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한 문제도 이런 유의 법정이 맡기에 적합할 것이다. <그랭구아르>지 사건이 악의적이었음은 2더하기 2가 4라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므로 금고형이나 징역형도 결코 지나친 처사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분명히 피할 수 있는 오류가 활자화되거나 방송을 탔을 때, 누구라도 그 사실을 발견하고 법정에 기소할 수 있다.

둘째 조처는 라디오 방송과 일간지를 통한 일체의 선전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 두 도구는 편향적이지 않은 정보 전달에만 쓰여야 한다.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특수한 법정들이 정보가 편향되지 않도록 잘 감시할 것이다. 

정보 관련 기관들은 잘못된 주장뿐만 아니라 의도적이고 편향된 누락 또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념들을 소통하고 그러한 이념들을 알리기를 원하는 모임들은 주간지, 격주간지, 월간지 등을 발간할 수 있다. 대중을 바보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들려는 뜻에서 내놓는 발행물이 이보다 더 자주 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 

설득의 도구를 바로잡는 것도 이 법정들의 감시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정보를 다루는 기관이 지나치게 자주 진실을 왜곡한다면 법정들의 심판으로 그 기관을 없앨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기관에 종사한 편집자들이 다른 이름으로 다시 언론 활동을 펼칠 수는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공적 자유의 침해가 조금이라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만 인간 영혼의 가장 신성한 욕구, 암시와 오류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판사들의 공정성은 누가 보증할까?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판사들의 절대적인 독립을 제외하고 본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겠다. 그들은 아주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배출되어야 하고, 광범위하고 명쾌하며 틀림없는 지성의 소유자라야 하며, 법을 가르치되 지식 교육보다 정신 교육을 우선시하는 교육기관에서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진실을 사랑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진실을 그러한 익숙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면, 진실에 대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가망은 아예 없다. 

 

1) 1928년에 창간된 주간지로서 정치적으로 보수 반동 성향을 띠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협력 언론으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