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김사이 시집
나는 오늘도 망설였다. 망설인 만큼 시간은 꿈지럭꿈지럭 지나갔고 배는 또 고프다. 어차피 쓸 거면서. 아무것도 아닌 걸, 별 것도 없는 걸, 궁시렁 꺼리만 늘텐데.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했다는 1971년생 김사이 시인의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제목이 그렇게 적절하게 마음에 와닿을 수가 없었다. 그 문장이 담긴 시의 제목은 더욱 가슴아프게도 「내 죄는 무엇일까」.
내 죄는 무엇일까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낳고 젖을 주고 흙을 다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따닥따닥 붙은 콜센터에서 상냥하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아도 웃고 보이지 않아도 참아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직업소개소를 찾으니
학력 미달 경력 없고 나이 많고 애도 있어
손가락 하나로 끌려나왔다 끌려나가도 그 자리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지 못한다
네가 죽어도 일을 해야 해서
누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
기약 없는 먼 훗날을 끌어당겨서라도
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쪼들려서, 악착같이, 외로움에, 죄책감으로 찌든
수척한 감정들이 들러붙어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파란색일까 까만색일까 붉은색일까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네가 지금까지 시집와서 한 게 뭐있어?"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서 시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목청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때 엄마는 내게 "그동안 너 애 많이 썼지, 이제 좀 쉬어도 돼." 라고 위로해 주셨고, 미화언니는 언제나 "너, 열심히 살았잖니." 해주신다. 그렇지, 잠도 잘 못자고 잘 놀지도 쉬지도 못하고 무언가 열심히 하긴 했지. 아파도 쉴 곳 없어 길거리에서 쭈그리고 하루를 버틴 날도 많았어. 시동생들이 장가를 간다고 할 때면 공부고 뭐고 알바 구하느라 울며 돌아다니던 때도 있었고. '딸을 낳으면 내가 외무부 장관으로 쓸텐데 왜 싫다고 하느냐'고 말하는 김대중 대통령 꿈에 이어서 어느 농부 아저씨가 커다란 밤나무 아래서 그 밤나무 만큼 큰 자루에 밤송이를 가득 담아 건내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았고, 아이가 깰까 아플까 조바심 내며 책을 붙들고 새던 밤도 많았지. 도저히 잘 틈이 없어서 삼일을 뜬눈으로 지내던 날도 있었어. 시간이 없어 어머니 생신을 밖에서 하면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들어야 했다, '한 게 뭐있냐'는 말을. 그날을 기억하고 있어. 충격이 너무 커서 지갑하나 들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던 거리를 넋 놓고 걸어 명동성당까지 갔었다. 시골의 아가씨들이 서울에 오게되어 함께 살기도 하고 작은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시게 되어 마지막 병수발을 우리집에서 한 적도 있어서 10명이 한 식구인 적도 있어 쉬는 날이면 밥을 다섯 번 차리고 한 번 밥 먹으면 쏟아지는 설겆이를 하면서도 '그래, 공부만 하면 머리 아프잖아. 설겆이 하면서 쉰다'고 생각했다. 결국 열심히 산 그 모든 시간 속의 그 모든 일들은 전부 어머니가 하신 것이고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나는 그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것밖에 없는 것이다. 시아버지 49재 미사를 마치고 나는 하느님께 나의 죄를 고하는 성사를 보았다. 그 때 내가 찾아낸 내 죄는 "시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였다. 보속은 「주님의 기도」. 시아버지의 그 말씀은 차례상, 제사상을 준비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들려온다. 그러면 나는 습관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한다. 김사이 시인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라는 말로 시 「내 죄는 무엇일까」 를 마칠 때 시어버지의 그 고함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에 없는 일 때문임을 알 것. 그리고 사랑이 없는데 하고 있거나 해야 하는 일은 당장 그만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