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지음, 위즈덤하우스, 2021
도서관 책수선 동아리에 들어갔다. 내가 선착순의 기회를 잡는다는 건 나의 바람과 미래가 객관적 우연처럼 일치하는 순간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 세상으로 이사하고 있는 시점에 책이라는 존재가 점점 애틋하게 느껴진다. 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스캔하고 파일로 저장하는 방법으로 물질적인 공간 부족을 해결하려고 했다. 정말 많은 책들을 파괴했다. 버렸다. 종이니까 재활용되는 줄 알았는데 지난 3주간의 책수선 수업을 듣고 보니 책은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폐품으로 팔 수는 있다. 그동안 나의 행동이 갑자기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으로 요즘 한 장, 한 권 붙여 보수하는 일에 점점 열심이다. 어서 빨리 '버리자', '비우자'며 조바심 내던 나의 마음과 너무 다른 마음을 만났다. 아무리 책이라도 소유하지 말아야지. 좀더 정성껏 만져주자, 책.
122. 나는 책을 수선하기 전에 훼손된 부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그 모습들을 수집하기 위해 책 수선을 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축적된 시간의 흔적에 매료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태양빛이, 공기 중의 물방울이, 또 사람의 손끝이 닿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책의 형상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그 인과관계가 만들어내는 모습은 늘 흥미롭다.
138. 별것 아닌 것 같은 두 가지 일이 나의 찢어진 1센티미터라고 생각하고, 그걸 다시 잘 붙여놓으면 내 삶에도 다른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 믿는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여도 본인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면 마음에서 놓지 말고 더욱 윤이 나게 간직할 수 있는 오늘을 보낼 수 있기를.
165. 관리만 제대로 되어준다면 책은 강하다. 상태에 맞게 절절한 관리만 계속 잘해준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만큼이나 오래 남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수선하는 일은 망가진 부분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이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앞으로의 방향을 안내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193. 사실 나는 그 흐트러진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제본을 풀어버리기가 내심 아쉬웠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203. 그 마음이 살아갈 책의 집을 짓는 것, 어떤 풍경을 가진 집으로 만들지 종이와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상상하고 손에 잡히는 책으로 만들어내는 일
210. 희귀한 책을 볼 때 하얀 면장갑을 끼는 건(아니, 그 어떤 장갑이라도) 오히려 책을 더 망가트릴 수 있다. 희귀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책을 만질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맨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대신 손을 비누로 깨끗하게 씻고 핸드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로!
272. 책은 영원히 수선이, 아니, 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책의 진화론을 믿는다면요.
300. 아이가 어릴 때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책을 깨끗하게 수선해서 다시 선물로 주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에 울컥, 또 설령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이가 들어 이 책을 볼 때 한 번쯤은 다시 부모님의 다정함을 새삼 느낄지도 모를 아이를 생각하며 괜히 나 혼자 또 한 번 울컥했다.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운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내겐 신기하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