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의 Attention 뜻 찾기(2)
2008년과 2021년 두 차례(<<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의 참고를 보니 1988년에도 번역)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을 번역한 윤진(여기엔 2021년 것)과 2017년 같은 책을 <철학 강의> 등의 글과 함께 번역한 이희영의 번역에서, 'Attention'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글 <l'Attention et la Volonté>를 골라, 'Attention'이 등장하는 문장들을 모아 보았다. 2012년 박진희란 분이 <<시몬 베유 노동 일지>>라는 제목으로 낸 책에서 <<중력과 은총>>에서 발췌한 내용들이 번역되었지만 이 <l'attention et la volonté>란 글이 빠져 있을 뿐만아니라 일본어 번역이 주인 관계로 비교가 힘들어 제외했다.
- <주의력과 의지> , <<중력과 은총>> , 시몬베유, 윤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2021. 中 : 주의력으로 통일해 번역했다
- <주의와 의지>, <<중력과 은총, 철학강의, 신을 기다리며>>, 시몬베유, 이희영 옮김, 동서문화사, 2017. 中 : 주의로 통일해 번역했다
- 의지가 아니라 주의력으로 과오들을 치유하려 해볼 것.
- 의지가 아니라 주의를 통해 온갖 죄과를 속죄하려고 시도할 것.
Essayer de remédier aux fautes par l'attention et non par la volonté.
- 덕을 행하기 위하여, 시를 쓰기 위하여, 혹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하여 근육을 긴장시키고 이를 악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주의력은 전혀 다른 게 아닐까?
- 덕을 실천하기 위해, 시를 쓰기 위해,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근육을 긴장시키거나 이를 악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주의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닐까?
Quoi de plus sot aue de raidir ler muscles et serrer les mâchoires à propos de vertu, ou de poésie, ou de la solution d'un problème? L'attention est tout autre chose?
- 가장 높은 단계에서의 주의력은 기도와 같다. 믿음과 사랑을 상정한다.
- 주의는 가장 높은 단계에서는 기도와 같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신앙과 사랑이 필요하다.
L'attention, à son plus haut degré, est la même chose que la prière. Elle suppose la foi et l'amour.
- 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주의력은 기도이다.
(철저히 순수한 관심이 기도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주의가 곧 기도이다.
L'attention absolument sans mélange est prière.
- 극도의 주의력은 인간에게 창조 능력을 준다. 그런 주의력은 언제나 종교적이다. 한 시대의 창조적 천재성의 총량은 극도의주의력의 총량에, 즉 그 시대의 진정한 종교의 총량에 정확히 비례한다.
- 극도로 긴장된 주의야말로 인간에게 창조적 능력을 만들어 준다. 극도의 주의는 종교적인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시대의 창조적 영감의 총량은 그 시대의 극도의 주의의 총량, 즉 진정한 종교의 총량과 정확하게 비례한다.
L'attention extrême est ce qui consitue dans l'homme la faculté créatrice, et il n'y a d'attention extrême que religieuse. La quantité de génie créateur d'une époque est rigoureusement proportionnelle à la quantité d'attention extrême, donc de religion authentique à cette époque.
- 잘못된 방식으로 찾기. 한 가지 묶인 주의력. 그 역시 빈자리를 두려워하는 현상이다.
- 잘못된 추구 방식. 한 가지 문제에 주의를 묶어 두는 것. 이것도 진공을 혐오하는 현상이다.
Mauvaise manière de chercher. Attention attachée à un problème. Encore un phénomène d'horreur du vide.
- 추구한 목표와 상반되는 결과를 맺는 노력들이 있다.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언제나 유용한 노력들도 있다. 어떻게 구별할까? 처음 것은 내적인 비참함에 대한 (가짜) 부정을 동반하고, 두번째 것은 자기 자신의 상태와 자기가 사랑하는 것 사이의 거리에 집중하는 주의력을 동반한다.
- 추구하는 목표와 상반된 결과를 낳는 노력이 있다. 한편 목표에 순조롭게 이르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유용한 노력이 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전자의 노력은 자기 내부의 비참함을 인정하지 않고(그것도 속임수지만), 후자의 노력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것 사이의 거리에 끊임없이 주의를 집중한다.
Il y a des efforts qui ont l'effet contraire du but recherché. D'autres sont toujours utiles, même s'ils n'aboutissent pas. Comment distinquer? Peut-être : les uns sont accompagnés de la négation (mensongère) de la misère intérieure. Les autres de l'attention continuellement concentrée sur la distance entre ce qu'on est et ce qu'on aime.
- 주의력은 욕망과 이어져 있다. 의지가 아니라 욕망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겠다는 동의에 이어져 있다.
- 주의는 의지가 아니라 그런 욕망과 이어져 있다. 아니면 좀더 정확하게 말해 동의와 이어져 있다.
L'attention est liée au désir. Non pas la volonté, mais au désir. Ou plus exactement, au consentement.
- 진정으로 바랄 것. 실행하려고 시도하지 말 것. 모든 시도는 헛되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냥 바라기만 할 것. 내가 '나'라고 지칭하는 모든 것이 수동적이어야 한다. 나에게서 필요한 것은 '나'가 사라져버릴 정도로 충만한 주의력뿐이다. 내가 '나'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서 주의력의 빛을 거두어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곳으로 옮겨놓을 것.
- 진정으로 염원해야만 한다. 다만 염원하는 데만 머물고, 그것을 스스로 실행하려 하지 말 것. 그런 방면에서의 시도는 모두 헛되고 또 비싼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행위에서는 내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오직 주의만, '나'가 사라져 버릴 정도로 긴장한 주의만이 필요할 뿐이다. 나의 이른바 '나' 전체에서 주의의 빛을 거둬들여 상상도 미치지 않는 곳에 그 빛을 비출 것.
Il faut désirer que cela soit fait en nous. Le désirer vraiment. Simplement le désirer, non pas tenter de l'accomplir. Car toute tentative en ce sens est vaine et se paie cher? Dans une telle oeuvre, tout ce que je nomme "je" doit être passif. L'attention seule, cette attention si pleine que le "je' de la lumière de l'attention et la reporter sur l'inconcevable.
- 우리가 중립적으로 선과 악에 똑같이 주의력의 빛을 비춘다 해도, 선이 자동적으로 이긴다. 그것이 바로 핵심적인 은총이다. 또한 선의 정의이고, 선의 기준이다.
-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해서는 안된다. 구별하지 않으면, 즉 어느 쪽에나 똑같이 주의를 기울이면, 선 쪽이 저절로 이기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은총이다. 또 선의 정의이고 기준이다.
Nous devons être indifférents au bien et au mal, mais, en étant indifférents, c'est-à-dire en projetant également sur l'un et sur l'autre la lumière de l'attention, le bien l'emporte par un phénomène automatique. C'est la grâce essentielle. Et c'est la définition, le critérium du bien.
- 우리가 주의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거두지 않는 한, 저항할 수 없이, 반드시 신적인 영감이 작용한다. 우리는 그 영감을 선택할 수 없다. 인정하길 거부하지만 않으면 된다.
- 신의 영감은, 거기서 주의를 돌리지 않고 스스로 거부하지 않으면 반드시 작용해 오는 법이다. 그렇게 되도록 굳이 선택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않으면 된다.
Une inspiration divine opère infailliblement, irrésistiblement, si on n'en détourne pas l'attention, si on ne la refuse pas. Il n'y a pas un choix à faire en sa faveur, il suffit de ne pas refuser de reconnaître qu'elle est.
- 사랑으로 신을 향해(혹은 보다 낮은 단계에서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모든 것을 향해) 주의력을 기울이면 더는 하 수 없게 되는 일들이 있다. 영혼 안의 기도처럼 행하지 않는 행동이 그렇다. 어떤 행동들은 일어나면 주의력을 가리게 되고, 역으로 주의력 때문에 불가능해지는 행동들도 있다.
- 사랑을 담아 주의를 신에게로(또는 좀더 낮은 단계에서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모든 것을 향해) 돌린다면 불가능해지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영혼 속에서의 기도가 능동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떤 행동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이러한 주의를 흐트러지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 주의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L'attention tournée avec amour vers Dieu(ou, à un degré moindre, vers toute chose authentiquement belle) rend certaines choses impossibles. Telle est l'action non agissante de la prière dans l'âme. IL est des comportements qui voileraient cette attention s'ils se produisaient et que, réciproquement, cette attention rend impossibles.
- 글을 쓰는 것은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 안 그러려 해도 저절로 지고의 노력을 쏟게 괸다.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고의 노력을 쏟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주의력을 기울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 글쓰기는 아기를 낳는 것과 같다. 이것이 최선이다 하는 지경까지 애를 쓸 수밖에 없다. 행동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것이 최고의 노력일까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 자신을 속이지 않고 충분히 주의를 지울인다면.
On écrit comme on accouche ; on ne peut pas s'empêcher de faire l'effort suprême. Mais on agit aussi de même. Je n'ai pas à craindre de ne pas faire l'effort suprême. A condition seulement de ne pas me mentir et de faire attention.
- 시인은 실재하는 것에 주의력을 고정시킴으로써 아름다움을 산출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고의 노력을 쏟지 못할 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주의력을 기울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 시인은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아름다움을 이끌어낸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진실로 존재함을 알기만 해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 온다.
Le poète produit le beau par l'attention fixée sur du réel. De même l'acte d'amour. Savoir que cet homme, qui a faim et soif, existe vraiment autant que moi - cela suffit, le reste suit de lui-même.
- 한 인간의 행동 속에 진실함, 아름다움, 선함이라는 진정한 가치들은 단 한 가지 똑같은 행위를 통해서 일어난다. 대상에 충만한 주의력을 쏟아야 한다.
- 어느 한 사람의 활동 속에 진 선 미 같은 진정으로 순수한 가치가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대상에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Les valeurs authentiques et pures de vrai, de beau et de bien dans l'activité d'un être humain se prosuisent par un seul et même acte, une certaine application à l'objet de la plénitude de l'attention.
- 교육은 주의력 훈련을 통해 그런 행동이 가능하게끔 준비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교육의 목적은 주의력을 훈련하여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L'enseignement ne devrait avoir pour fin que de préparer la possiblilité d'un tel acte par l'exercice de l'attention.
- 학문과 신앙. 기도는 순수한 형태의 주의력이고 학문은 주의력의 훈련이다. 따라서 모든 학습은 영적인 삶의 굴절이(어:책에 빠져있...)야 한다. 그러려면 체계적인 방법론이 필요하다. 라틴어 시구를 짓는 어떤 방식, 기하학 문제를 푸는 어떤 방식은(모든 방식이 그렇지는 않다) 주의력이 기도에 보다 잘 부합되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다.
- 학문연구와 신앙. 기도는 순수한 상태에서의 주의이고, 학문연구는 주의력의 훈련이라 할 수 있으므로, 학교에서의 학습은 모두 영적 생활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그것은 체계적인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라틴어를 번역하는 데도, 기하학 문제를 푸는 데도 어떤 일정한 방식을 지키는 것이(어떤 방식이라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주의력을 기도에 훨씬 더 적합하게 하는 훈련이 된다.
Etudes et foi. La prière n'étant que l'attention sous sa forme pure et les études constituant une gymnastique de l'attention, chaque exercice scolaire doit être une réflraction de vie spirituelle. il y faut une méthode. Une certaine manière de faire un problème de géométrie(et non pas n'importe quelle manière) constituent une gymnastique de l'attention propre à la rendre plus apte à la prière.
-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되는 우리가 그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동일한 것을 주시한다면 환상이 사라지고 실재가 나타난다. 주의력이 집착이어서는 안되고 단지 시선이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은 변화하지만, 그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동일한 것을 주시하며 시선을 떼지 않으면 결국 환상이 사라지고 실재가 나타난다. 단 조건이 있는데, 주의가 집착이 되어서는 안되고 단지 응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Avec le te,ps on est modifié et si, à travers les modifications, on garde le regard orienté vers la même chose, en fin de compte l'illusion se dissipe et le réel apparaît. La condition est que l'attention soit un regard et non un attachement.
- 의무에 매인 의지와 나쁜 욕망 사이에 갈들이 일어나게 되면 선에 연결된 에너지가 소모된다. 욕망의 공격을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체험하는 고통을 겪을 때처럼 수동적으로 감내해야 한다. 그렇게 선을 향해 계속 주의력을 쏟아야 한다. 그러면 에너지의 질이 높아진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의지와 악한 욕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선에 기울어졌던 에너지가 다 소모되어 버린다. 자기의 비참함을 통감하면서 괴로워할 때처럼, 욕망의 혹독한 공격도 그대로 견뎌 내야만 한다. 그리고 가만히, 선을 향해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에너지의 질이 점차 높아진다.
Quand il y a lutte entre la volonté attachée à une obligation et un désir mauvais, il y a usure de l'énergie attachée au bien. Il faut subir la morsure du désir passivement, comme une souffrance où on éprouve sa misère, et maintenir l'attention ournée vers le bien. IL y a alors élévation dans l'échelle des d'énergie.
- 욕망이 얻으려 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그 욕망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은총의 도움으로 욕망을 다스릴 수 있고 또 욕망을 소모시킴으로써 파괴할 수 있다. 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주의력이 이러한 진실과 계속 접할 수 있게만 하면, 이미 욕망을 이긴 셈이다.
- 욕망이 갖고가 하는 것은 무한하지만 욕망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도움으로 욕망을 다스릴 수 있고 또 소모시켜 파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진실을 접하는 데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욕망을 극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Nos désirs sont infinis dans leurs prétentions, mais limités par l'énergie dont ils procèdent. C'est pourquoi, avec le secours de la grâce, on peut les dominer et, en les usant, les détruire. Dès qu'on l'aclairement compris, on les a virtuellement vaincus, si l'on conserve l'attention au contact de cette vérité.
- 고독의 가치는 주의력을 더 많이 쏟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앞에 사람이 있어도 똑같은 정도의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 그(고독의) 가치는 주의력을 작용하게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을 마주하고서도 그것과 똑같은 정도로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Le prix en(de solitude) consiste dans la possibilité supérieure d'attention. Si on pouvait être attentif au même degré en présence d'un être hu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