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일에 대하여

노예적이지 않은 노동의 첫째 조건, 시몬 베유

빨간차무다리아줌 2022. 3. 1. 22:09

궁금해서 시작했는데 앎이 짧아서 도무지 글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자꾸 공부할 건 많아지고...

계단 참에 잠시 서서 ... 나이가 들어 머리가 성장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다음 참에 오를 조그만 힘을 얻었으니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기로. 

 

노예적이지 않은 노동의 첫째 조건1)

 

손으로 하는 일, 소위 노동이라 하는 것에는 완벽한 사회 정의의 구현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노예 상태라는 간단치 않은 요소가 있다. 궁극 목적이 아닌 필요가 노동을 지배한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필요 때문이지 득2)(un bien)이 있어서가 아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일터에 있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노력을 제공하지만 궁극에는 모든 면에서 있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수고조차 하지 않는다면 있는 것도 잃게 되리라.

 

수고하는 에너지의 근원은 욕망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욕망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욕망은 방향이다. 어떤 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있지만, 거기에 우리는 없다. 기껏 시작된 움직임이 출발점에 묶여버리면 장에 갇힌 다람쥐처럼, 독방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돌게 된다. 그렇게 돌다가 곧 토하게 된다.

 

구토, 무기력, 혐오는 노동하는 이들이 빠지고 마는 커다란 유혹이다. 비인간적 조건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때때로 최고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유혹에 더 잘 걸려든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목적이 아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재화(tous les biens)의 밑바탕일 뿐이다. 재화3)(les biens)가 존재에 더해진다. 재화가 사라져 버리면, 존재가 그 어떤 좋은 것(aucun bien)으로도 장식되지 않고 헐벗게 된다면, 그런 존재는 선4)(le bien)과 도무지 관련이 없다. 심지어 그런 존재는 악이다(un mal). 바로 이 순간 존재는 없는 모든 재화 대신 스스로 유일한 목적, 유일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때 영혼의 욕망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악5)에 메어 있다. 이렇게 영혼은 공포로 빠져들게 된다.

 

이는 폭력적으로 닥쳐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공포 그것이다. 과거 이 공포의 순간은 정복자의 칼에 무장해제 된 이에게 평생토록 지속되었다. 생명을 건진 대가로 그는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종일 아무런 희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수고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거나 채찍에 맞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어떠한 이득도 추구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말했다. 노예가 된 그 날 영혼의 반을 빼앗겼다고.

 

우리도 하루 혹은 한 달 또는 1년 아니 20년을 수고하고 마지막 날이면, 앞에 이야기한 노예가 맞이한 그 날과 꼭 같은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는 점에서 모든 조건이 노예 상태와 유사한 점이 있다. 소유하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욕망할 수 없고 이익 획득을 위한 노력 경주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오로지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시간의 단위는 하루라는 지속시간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쳇바퀴를 돈다. 노동과 휴식을 벽에 맞고 튀어 돌아온 공을 다시 던지듯이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먹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일한다. 반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먹는다. 그리고 또다시 먹기 위해 일한다.

 

이런 삶 속에서 모든 것은 중간재6), 모든 것이 수단이다. 거기에 목적성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만들어진 물건은 하나의 수단이다. 이 물건은 팔리게 될 것이다. 누가 그 속에 자신의 선(son bien)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물질, 도구, 노동자의 육체, 그의 영혼조차도 제조를 위한 수단들이다. 필요는 어디에나 있지만, (le bien)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에서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 원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이는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것은 노동의 조건이 지닌 본질이다. 우리는 앞선 세대에서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수고를 거의 느낄 수 없게 하는 엄청난 무력감과 강한 육체의 힘이 공허함을 견딜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상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 또는 자식을 위한 또 다른 사회적 조건에 대한 야망이 그 하나다. 손쉽고 폭력적인 쾌락, 이 또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야망을 대신하는 꿈이다. 일요일은 우리가 노동할 필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자 하는 날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비해야만 한다. 마치 일하지 않는 듯이 옷을 입어야 한다.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학위라는 것이 쉬이 제공하는 권력이라는 환영이 필요하다. 방탕한 생활은 마약 같아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늘 유혹이 된다. 혁명 역시 이와 같은 보상이라 하겠다. 이것은 집단으로 옮겨진 야망이다. 처한 조건 너머로 상승하려는 노동자들 모두의 미친 야망이다.

 

혁명의 감정은 대부분 이들에게 무엇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이는 많은 경우 역사적으로 그러했듯이 국가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급격히 노동자의 제국주의가 되어버렸다. 제국주의가 갖는 목적은, 하나의 특정 집단이 전체 인류와 인간 삶의 모든 양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제한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건, 이런 꿈을 꾸며 지배력을 손에 넣은 이들은 이를 행사하자마자 곧 지배가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혁명이라는 생각은 선하며(bonne) 건강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조건 자체가 지닌 본질적 불행(le malheur)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혁명이라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어떤 혁명도 그 불행을 없애지 못한다. 하지만 이 거짓말이 지닌 영향력은 무엇보다 막강하다. 본질적인 불행이 불의보다 더 생생하게, 더욱 깊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보통 이들을 혼동하고 있다. 종교가 부패하자 마르크스가 이를 일컬어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지만, 본질로 말하자면 혁명 역시 그렇게 불려 마땅하다. 혁명의 희망이란 언제나 아편과 같다.

 

혁명은 동시에 이러한 모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는 필요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서 여전히 불행 자체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다. 청소년들에게 나타나는 소설과 범죄영화에 대한 취향, 범죄성향 등등 또한 이러한 욕구에 해당한다.

 

자본가는 나약하게도 처방을 잘하면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목적 즉, 돈을 얻는 방법을 민중에게 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분업화와 도시-시골 간 교역 확대를 통해서 가능한 한도 범위 내에서 이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것이 불만을 초래하고 위험성은 악화될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욕망과 노력의 목적으로서 돈이라는 영역에서 부자가 되지 못할 조건이란 있을 수 없다. 작은 공장, 작은 상점도 부자가 될 수 있고 큰 공장, 큰 상점이 될 수 있다. 교수, 작가, 관료는 이와 상관없이 부유하거나 가난하다. 그런데 대단히 부유해진 노동자는 노동자이길 멈추고 거의 항상 농부와 같아진다. 노동자는, 혼자 또는 자신의 동지들 모두와 함께, 노동 조건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돈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힐 수가 없다.

 

노동자들이 사는 세계는 궁극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극히 짧았던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목적이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 신생 국가들의 공장에서는 거의 매일 모두에게 기대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새로운 것들을 제안하면서 활기차게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건설의 열기는 러시아 공산주의를 유혹하는 거대한 기계가 되었다. 그것은 우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그 열기는 사실 국가의 경제상황에 관심이 있었을 뿐 혁명이니 마르크스주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처럼, 우리가 이토록 짧고 예외적이며 과도기적인 상황을 따라 형이상학을 전개한다면, 그 형이상학은 거짓말이다.

 

가정에서는 키워낼 아이의 모습이 목적이 된다. 아이들을 위한 또 다른 조건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사회적 상승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외적인 본성을 지닌다 꼭 같은 존재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그 존재가 지닌 무게와 공허함을 고통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짓누르는 듯한 이 공허감은 대단히 고통스럽다. 그것은 문화가 부재하거나 지식이 부족한 많은 이들에게서도 감지된다. 처해 있는 조건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들은 평생 이를 견뎌온 이들의 행동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그 고통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굶주림만큼 괴로울 수 있다. 아니 더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빵보다 더 필요할지 모른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 단조로움을 견디게 하는 오직 하나, 그것은 영원의 빛이다. 바로 아름다움이다.

 

영혼의 욕망이 가능한 것 또는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인간의 본성이 참아내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런 경우란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욕망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다른 것이길 원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자체이길 바란다. 우리는 욕망하며 투명한 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단지 그 광경을 소유하는 것뿐이다.

 

민중은 자신이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해 자신의 모든 욕망을 투사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고 민중은 아름다움을 위해 만들어진다. 나머지 다른 사회적 조건들에 시(詩)란 일종의 사치다. 민중에겐 빵과 마찬가지로 시가 필요하다. 말속에 갇힌 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그 자체로는 민중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이라는 일상의 실체 자체가 시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시의 원천은 하나다. 그 원천은 신이다. 이런 시만이 종교가 될 수 있다. 어떠한 계략, 어떠한 과정, 그 어떤 개혁이나 전복을 통해서도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조건을 통해 궁극의 목적이 노동자들의 세계로 스며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계는 오직 진리인 단 하나의 목적에 온전히 매달려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신에게 매달릴 수 있다. 노동자들의 조건 속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이루는 궁극의 굶주림이 해소될 수가 없다. 해소된다면 그것은 신을 통해서이다.

 

바로 거기에 노동자들이 가진 특권이 있다. 그들만이 그것을 소유하게 되어 있다. 다른 모든 조건들 속에는, 예외 없이, 특수 목적이 작용하게 된다. 하나의 영혼 또는 여러 영혼의 구원일 수 있을 때 이 특수 목적은 장막을 쳐 신을 숨긴다. 떨어져 나옴으로써 막을 뚫어야 한다. 노동자들에겐 막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들을 신과 나누어 놓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고개만 들면 된다.

 

그들에게 어려운 것이 이렇게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 들의 경우처럼 애써 버려야 할 잉여의 것이 없다. 그들은 가진 게 너무 없다. 그들에게는 중간재(intermédiaires)가 부족하다. 그들에게는 신을 생각하고 그분에게 자신의 고난과 고통을 봉헌하라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특별하게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신을 향해갈 수 있도록 주의(attention)를 끌어줄 매개물들(intermédiaires)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회 건축물, 교회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 제의와 기도문들, 제의를 올리는 신부의 몸짓 들이 이러한 매개물들이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교회는 신을 향한다. 그러한 매개물들이 얼마나 일터에는 더 필요한지 모른다. 그곳에 우리는 오직 생계유지를 위해서만 나가고 있다! 일터에서의 생각은 모두 지상에 메어 있다.

 

그런데 그곳에 성화들을 걸어 놓고서 일하는 람들에게 쳐다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일하면서 기도문을 외우라고 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이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그들이 일하면서 만지는 재료, 기구, 일하는 동작이다. 이러한 대상들 자체가 빛의 거울로 변모하지 않으면 노동하는 동안 빛의 근원을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변화보다 더 시급히 필요한 일은 없다.

 

이는 오직 노동이 물질 속에 자리 잡을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인간의 노동에 반사적 속성이 부여된다. 자유로운 상징이나 상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허구, 상상, 몽상은 노동자들의 자리보다 진리와 관계가 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물질 속에는 반사적 속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숨결로 흐려진 거울이다. 그 거울을 닦아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물질 속에 씌어있는 상징을 읽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그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방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새롭게 태어날 목적을 가지고 정신적인 죽음의 필연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위해서, 죽음만이 풍요롭게 키워낼 수 있는 씨앗과 관련된 말들을 읽거나 반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은 그가 원한다면 다른 어떤 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몸짓과 땅을 파고드는 씨앗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가 진리의 변죽을 울리는 게 아니라 진리만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임무 완수에 기울이는 주의는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최고로 수행된다. 종교적으로 기울이는 주의를 절정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최고 수준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기도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된 영혼은 포도덩굴에서 잘린 가지와 마찬가지로 말라버린다. 포도나무 가지치기 일은 며칠이고 넓은 지역에 걸쳐 계속된다. 여기에도 몇 날 며칠을 지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

 

사물의 본성 속에 영원히 내재해 있는 다른 수많은 상징을 발견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 상징들은 노동을 보편적으로 변모시킬 뿐만 아니라 각각의 일을 저마다 특수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는 청동 뱀으로서, 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끊임없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삶의 필요와 의무 때문에 응시를 불가능하게 하는 사물들이 우리가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막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야만 한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교회엔 상징이 가득한데 우주가 상징으로 한없이 가득 차 있지 않다는 건 상당히 놀랄 일이 아닐까. 우주는 끝없이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읽어야만 한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저울에 비유되는 십자가 이미지는, 짐짝을 지고 레버를 조작하며, 저녁이면 물체의 무게로 지친 이들에게 마르지 않고 솟아오르는 영감이 될 수 있으리라. 저울에 놓인 추가 무겁고 중심 가까이에 있다 해도 가볍지만 아주 멀리 놓인 추에 들릴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매우 약한 추였다. 그러나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로 세상을 들어 올리는 평행추가 되었다. 아주 달라 보이지만 꼭 같은 이미지로, 수고하고 짐을 들어 올리며 레버를 만지는 그 누구든 자신의 연약한 몸으로 세상에 평행추가 되어야만 한다. 그건 너무나 무겁다. 그래서 때로 세상은 육체와 영혼을 굽혀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에 매달려 기대는 사람은 쉽게 평행추가 될 것이다. 이를 한 번 깨닫게 되면 그는 피로, 권태, 혐오에도 주의를 딴 데로 돌리지 않는다. 그는 늘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태양과 식물의 수액은 들판에서 쉼 없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 에너지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먹는다. 그리고 수액이 우리를 서 있게 하고 근육을 움직여 온갖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아마도 그것은 여러 형태로 무거움에 대항하는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힘일 것이다. 이것이 나무 속을 타고 올라 우리의 팔로 짐을 들어 올리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닿을 수 없는 근원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우리는 그곳에 한 발자국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이는 우리 위로 계속 내려온다. 끊임없이 우리를 적시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잡을 수 없다. 식물의 엽록소만이 이를 모아 우리의 양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수고하여 대지를 적절하게 정돈하여야 할 뿐이다. 이렇듯 엽록소를 통해 태양 에너지는 견고해진다. 이렇게 빵으로, 포도주로, 기름으로, 과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농부가 하는 모든 노동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미지인 식물의 덕(cette vertu végétale)을 돌보고 가꾸는 것이다.

 

기계의 법칙은, 기하학에서 유래하고 기계에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초자연적 진리를 품고 있다. 규칙적인 떨림은 지상의 조건이 지니는 이미지이다. 창조물에 속하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 기원의 표식인 우리 안의 욕망은 예외다. 우리의 탐욕은 우리에게 지금 이곳에서 무한을 찾게 하는 것으로,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다. 사물이 지니는 행복(les biens)은 유한하다. 불행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원인은 어떤 지점까지로 정해져 있는 결과를 만들 뿐이다. 원인이 그 너머로까지 계속해서 작용한다면 결과는 되돌아온다. 모든 사물에 한계를 부과하는 존재는 신이다. 그의 부름에 바다가 한곳으로 모였다. 신 안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관계하며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어떤 대상도 가지지 않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행위가 있을 뿐이다. 창조물 속에는, 밖으로 향하나 그 한계 때문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이 흔들림은 신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반사되는 흐린 빛이다. 기계 속에서 이런 관계는 회전 운동과 진동으로 드러난다. 원은 비율 평균의 궤적이다. 단위와 제곱이 아닌 숫자 사이의 비례 평균을 엄밀히 완벽한 방법으로 찾기 위해서는 원을 그리는 방법밖에 없다. 자연적으로 단위에 연결되는 어떤 매개도 존재하지 않는 수들은 우리 불행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수의 영역에 초월해 외부에서 와 수의 영역과 관계하여 초월적인 방식으로 중재하는 원은 이 불행에 대한 유일한 치유 이미지이다. 그러한 진리와 더불어 다른 많은 것들이 진동 운동을 결정하는 도르레의 간단한 움직임 속에 쓰여 있다. 매우 기초적인 기하학 지식으로도 이를 읽을 수 있다. 노동의 리듬은 진동에 해당한다. 노동의 리듬으로부터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진리와 더불어 많은 것들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이를 관조하기에 너무나 짧은 유예 시간이다.

 

또 다른 상징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는 이들의 행동에 내면 깊숙이 일치한다. 노동자가 덕을 최대한 갖추기 위해선 자신이 일을 대하는 태도를 예외 없이 모든 사물에 펼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육체노동이 아닌 다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찾아야 할 상징도 있다. 산술 계산 같은 기초적인 작업을 하는 회계사, 경리부의 현금출납원 등등을 위하여 상징을 찾아야 하기도 한다. 그 저수지는 마르지 않는다.

 

여기서 출발해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기초과학과 문화 일반 개념 관련 큰 이미지들을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전하기. 이들의 축제나 연극을 위한 주제로 제시하기. 이를 중심으로, 예를 들어 14세 어린 농부가 처음 스스로 일을 하는 경사스러운 날 전야제 같은 새 축제 만들기. 여자와 남자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항상 초자연적인 시의 분위기에 젖어 살게 하기. 중세 때처럼 아니 중세 때 보다 더. 어째서 선에 대한 이러한 소망에 한계를 두겠는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매우 자주 때때로 아주 고통스럽게 느끼곤 하는 지적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쩌다 정신적인 것과 가볍게 스치듯 만나 대신 자리하게 되는 오만한 확신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인들 역시 몇 해 전 몇몇 지역에서 자행되었던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멸시와 우민정치 못지않은 취급을 삼가야 할 것이다. 서로 모여 어떤 불평등 없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절정은 기도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적어도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지점이 존재함을 알고 이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양성이 하부에서 분열을 양산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하나의 산이 지닌 중후함이 그러하듯 평등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 어떤 중요한 목적보다 학교에서 연마해야 할 것은 바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법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영혼이 신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능력이다. 학교 체육 교육은 이성적 판단 능력 즉 논리적 추론 면에서는 열등한 주의력을 단련시킨다. 그렇지만 체육 교육을 알맞은 방식으로 진행하면 영혼 안에 더 고등한 능력인 직관적 주의력이 생겨나도록 할 수 있다. 순수한 상태의 직관적 주의력은 완벽히 아름다운 예술, 진정 빛나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 참다운 지혜를 향하는 철학, 진실로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다. 바로 이러한 관심과 주의가 직접 신을 향할 때 진정한 기도가 된다.

 

하나의 상징체계가 삽질하고 낫으로 벰으로써 신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과정을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고양시킬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방법만이 청소년들이 기하학 문제를 풀거나 라틴어 번역을 하는 동안 신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지적 노동이라면 그 역시 노예적인 노동이다.

 

여가가 있는 사람들이 직관적 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들 능력의 한계까지 논리적 지성을 단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논리적 지성은 장애가 된다. 특히 이러한 지성을 발휘시키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지적 노동 역시 다르지 않다. 반면 일상의 긴 노동으로 지쳐 그런 능력이 완전히 무력해진 이들에게는 그것이 크게 장애가 될 일도 없고 이를 단련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을 이렇듯 무력하게 하는 노동이 시로 변화될 수만 있다면, 바로 그것이 직관적 주의로 이끄는 길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교육의 차이가 빈부의 차이보다 더한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낸다. 마르크스가 악을 묘사하면서, 단순 노동과 지식 노동의 분리를, 거의 한결같이 매우 강경히, 악화라고 비난한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반대되는 이 두 가지 노동이 이들을 초월하는 차원에서는 하나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지식 노동과 단순 노동의 일치점은 바로 노동이 아닌 관조(cotemplation, 신과의 합일)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과 동일한 종류의 주의력을 신장시킬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서로가 공정하게 욕망하고 수단을 가진다면, 각자가 사회에서 자신의 몫에 알맞은 주의력을 기름으로써 모든 사회적 책임에 해당하는 또 다른 주의력이 발현해 발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이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구축한다.

 

학생과 청년 농부, 청년 노동자가 매우 정확하게, 기계장치 각 부분이 명확히 이해되는 것 같이 정확하게 표현된다면, 다양한 사회 기능들이 하나의 가치를 지닌 동일한 초월적 능력이 영혼 속에 발현되는 데 똑같이 효과가 있는 교육을 조직하듯, 평등이 구체화 되어 정의와 질서의 원리가 될 수 있을 터이다.

 

각각의 사회적 기능의 초자연적 목적지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개혁 의지에 규범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규범이 불의를 정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의 본성에 새겨진 고통을 불의로 본다거나 우리의 범죄의 결과로 당하지 않아도 될 이들이 부딪치는 고통을 인간 조건이 지닌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종속관계와 획일성은 노동의 본질에 새겨있는 고통이며 노동에 상응하는 초자연적 소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본질과 소명은 사위지 않는다. 이에 더해진 모든 것은 불의하며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한 노동 환경이, 시의 잃어버린 근원을 찾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 노동 환경이 불량하면 이 근원을 죽인다.

 

욕망 또는 변화에의 두려움, 미래를 향한 사유의 방향과 확고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은 동형의 존재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여겨지는 존재로부터 본질적으로 축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에 필요하여 피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 육체적 고통을 없애야 한다. 사실, 한숨 돌리지도 못하고 고통을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다른 사회 조건에 있다면 궁핍한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음식, , 휴식과 여가는 육체적 고통 없이 하루치 노동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한편, 이 생활에는 필요 이상의 것 역시 자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요 이상의 것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가 한계가 없고 조건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통해 노동자들이 필요 이상의 것을 욕망하도록 부추기는, 형태도 다양한 모든 광고, 모든 프로파간다들은 범죄로 간주 되어야 한다. 개인은 직업적 적성이 철저히 부족해서든 다양한 능력이 있어서든 언제든지 노동자의 조건 또는 농부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조건 또는 농부의 조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변화는 복지를 협소한 범위로 제한하느냐 광범위하게 시행하느냐 하는 것 외엔 없을 것이다. 여기선 그들이 조금이라도 추락할까 두려워하거나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를 희망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사회 조건에 있는 것이 다른 조건에 처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따라서 수요공급의 우연이 사회적 조건을 주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독단은 영혼을, 스스로 방어할 수 없게, 두려워하지도 희망하지도 못하도록 억압한다. 그러므로 노동에서는 가능한 이를 축출해야 한다. 권력 기관은 그것이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곳에서만 현존해야 한다. 농민이 지닌 소규모 소유재산이 대규모 소유재산보다 더욱 가치 있다. 그러니 소규모 재산 소유가 가능한 곳 어디에서든 대규모 자산은 악이다. 마찬가지로 작은 공방에서 생산되는 부품의 제조가 감독관 지시하에 만들어지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노예가 감독관이 호령하는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기에 욥은 죽음을 찬양한다. 명령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현실적으로 조정해 죽음을 침묵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악이다.

 

가장 저열한 위해 행위란, 분명히 의식하지 못하고 저질렀다 하더라도 인간 정신에 저지르는 범죄와 같은 것으로, 노동자들의 주의력(attention)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 안에서 초자연적 소명의 근간이 되는 능력을 말살한다. 테일러식 경영에 의한 노동이 요구하는 가장 낮은 유의 주의력은 다른 것과 양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속도 걱정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걸 정신에서 비워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노동은 변모될 수 없다. 없애야 한다.

 

모든 기술과 경제 문제들은 가능한 가장 좋은 노동 조건 개념에 따라 진술되어야 한다. 최상의 노동 조건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으뜸가는 규범이다. 모든 사회는 무엇보다 노동이 노동하는 사람들을 끌어내리지 않도록 조직돼야 한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기쁨을 갈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값을 치르고 얻는 쾌락이 아니라 가난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무상의 즐거움 말이다. 노동자들의 삶을 감싸는 초자연적 시는 순수한 상태에, 때로 눈부신 축제 속에 집중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축제는 걷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거리 표식처럼 이 존재 방식에 꼭 필요하다. 무상으로 하는 힘든 여행이 과거 투르 드 프랑스처럼 청년기에 보고 배우고자 하는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으리라. 모든 걸 잘 조직하여 그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무엇도 부족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 중 최고는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술가들이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구하는 풍요로움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소명이 수고하여 순수한 기쁨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노동자들이야말로 다른 그 누구보다 가장 실제적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 1941년 마르세유에서 씀. 1947년 Cheval de Troie 4호에 부분적으로 실려 출판.

2) 득하다 : 무엇을 얻거나 이익을 얻다

3) 사람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주는 모든 물건(네이버 국어사전)

4) 어원 ‘좋음’, ‘착함’을 뜻하는 라틴어 bonum(철학사전인물과개념들, 동녘, 2001)

5) 어원 ‘악’,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malum(철학사전인물과개념들, 동녘, 2001)

6) 생산 과정에서 다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재화. 원재료 따위의 생산재를 이른다.(네이버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