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고흐의 빈의자, <<인공지능과 흙>>, 김동훈, 민음사, 2021.

빨간차무다리아줌 2022. 3. 19. 11:29

오베르 쉬르 우아즈, 라부여관의 고흐 방의 빈 의자. 프랑스어는 그 방에 적혀 있던 글. 그날 품었던 작은 소망에 대하여 생각함.

Un jour ou un autre je crois que je trouveras moyen à faire une exposition à moi dans un café. (언제가 되든 카페에서 내 전시회를 열 방법을 찾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날은 여름이고, 구경하는 사람은 많고, 방은 정말 작고, 한참을 걸어 올라와 연세 드신 분들은 정말 힘들 것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그 작은 방 가운데 놓인 저 빈의자 위에 한 아줌마가 털썩 주저 앉아 땀을 닦았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나는 작은 공감 상태에 있었어서,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그 '빈의자'에 대한 글을 만났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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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빈 의자' : "나는 세상에 빚과 책임이 있다!" (294-303쪽)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의자'라 이름 붙인 두 점의 유화를 남겼다. <빈센트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가 그것이다. 두 그림 모두 의자가 가장자리까지 꽉 들어차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고흐와 고갱이 완전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듯 두 그림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사람은 없고 그들을 상징하는 물건들만 놓여 있다는 기획이 같을 뿐이다. 고흐는 아를의 '노란'집에서 고갱과 만난 후 처음 이 의자들을 그렸다. 고갱이 떠난 후 이 그림들에 계속 매진했고, 완성한 후에는 또 다른 <빈 의자> 소묘 다섯 점을 남겼다. 

(...)

고흐의 빈 의자

 

반면 <빈센트의 의자>는 팔걸이가 없고 다리가 직선이다. 그리스식 의자 유형으로 보자면 특별히 속할 데가 없다. 그런데 고흐는 테오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과 자신의 의자가 모두 '빈 의자'임을 거듭 강조했다.

'빈 의자'의 체험은 고흐가 스물다섯 살 되었을 때 일어났다. 고흐는 미술상으로서 실패한 뒤 여린 마음을 추스르고자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가 걸었던 목회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곧 신학생이 되기 위해 예비 어학 공부에 전념했지만  공부는 너무 따분하고 어려웠다. 결국 1878년 8개월 만에 신학 준비 과정을 포기하고 평신도 설교자가 되는 길로 바꾸었다. 그동안 공부방에 찾아와 지도해 주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흐는 바로 이때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아버지의 '빈 의자'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편지에 따르면, 고흐는 아버지를 역까지 배웅한 후 기차가 떠나고 그 모습이 다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플랫폼에 서 있었다. 자신의 방에 돌아오자 이제는 필요도 없는데 전날과 다름없이 책과 잡지들은 무심한 듯 그대로 남아 있고, 아버지의 텅빈 의자는 책상에 바싹 당겨져 있었다. 고흐는 빈 의자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곧 다시 만날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난 그때 아이처럼 슬펐어."

아버지의 빈 의자라는 이미지가 책상 앞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은 신학 공부를 결심하기 전, 그러니까 이십 대 초반의 체험과도 관련된다. 열일곱 살 때 다니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서 고흐가 처음 시작한 일이 있었다. 삼촌이 운영하는 미술상의 점원 생활, 4년여 기간 동안 성실하게 일하자 스물한 살에 런던 지점의 물품 창고 일을 맡아 전근 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다음 해 파리 지점으로 임시 파견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가 그 다음 해에 파리로 다시 전근을 갔다. 이렇듯 빈번하게 오간 것은 런던 하숙집 딸에게 실연한 데다가 테오의 친구 두 명이 자살하고 지인 한 명이 죽는 등 우울한 소식들이 연일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흐는 파리로 전근 간 다음 해인 1876년에 해고당할 상황에서 먼저 사직서를 제출했다. 고흐는 이 시절 외로움과 무기력 속에서 성서와 찰스 디킨스(1812-1870)의 글을 의지했다고 한다.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삽화를 그리면서 디킨스를 알게 된 루크 필즈는 디킨스가 죽던 날 방에서 빈 의자를 보았어. (...) 텅 빈 의자는 아주 많아. 그 수는 늘어날 거야. 조만간 빈 의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 빈센트 반 고흐, <<편지>>에서

 

루크 필즈(1843-1927)라는 화가는 디킨스가 죽자 그를 애도하며 그림 한 점을 그렸다. 이것이 영국 사회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원래 삽화가로 시작해서 유화 화가로 유명해진 인물인데, 디킨스로부터 삽화를 부탁받았다. 함께 작업을 하다가 필즈는 디킨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마음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게 바로 <빈 의자>였다. 

고흐는 런던 근무 당시에 루크 필즈의 <빈 의자>를 보았고,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그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다. '빈 의자'라는 이미지에서 그동안 자신에게 큰 권위로 여겼던 두 사람의 부재가 슬픔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와의 일시적인 작별과 디킨스와의 영원한 작별은 빈 의자가 내포하고 있는 헤어짐의 미학이었다. 고흐의 아버지도 1885년 갑작스럽게 이 세상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고흐의 아버지 '페르 탕기'

 

고흐가 친아버지 외에 일생에 한 번 아버지라 부른 인물이 있다. 2년간 파리에서 지내며 알게 된 화구상 탕기 영감(줄리앙 탕기, 1825-1894)이다. 당시 고흐의 상황은 1886년 2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1885년 5월 이후 (지금까지) 따뜻한 식사를 해본 건 여섯 번밖에 없어." 거의 9개월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한 고흐를 탕기 영감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며, 때론 그의 신세를 한탄하고 때론 그의 재능에 탄복했다. 종종 고흐가 캔버스, 물감, 붓 등 화구를 집어 들고 돈 대신 그림들을 내밀면 마치 그 그림의 진가를 인장한 듯 받아주었다. 탕기 영감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고흐의 그림들을 자신의 화방에 전시하여 파리의 화가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식을 챙기는 따뜻한 마음으로 고흐가 파리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많이 이애해 달라고까지 당부했다. 그런 그를 파리 화가들이 '탕기 아버지(Père Tanguy)'라 호칭했듯이, 고흐도 "나의 친구이자 아버지"라 부르며 마음을 담아 총 세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고흐에게 절박했던 것은 열일곱에 그만둔 학교 졸업장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나 인생을 먼저 산 어른들의 따뜻한 마음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흐가 십 대 이후 만난 어른들은 무엇이든 하라고 닦달만 할 뿐이었다. 미술상인이 되어 돈을 벌든가 최고의 목사가 되어 존경을 받든가, 아니면 유명한 화가가 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든가 하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고흐의 재능을 알아봐으면서도 그의 실력을 시샘하여 그의 약점을 들춰내는 어른도 있었다. 정작 고흐에게 필요한 어른은 돈을 많이 버는 자도 아니고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회화의 원칙을 세워 규정하는 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고여 잇는 그 잠재력의 막힌 물꼬를 틔워주기만 하면 감사할 지경이었다. 

작품을 만들어내고 자식을 낳은 어른은 진정한 권위를 지닌다. 권위(authority)의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만든자' 또는 '낳은 자'인 '아욱토르'(auctor)에게 부여된 성질이다. 무엇을 창작해 낸 자(author)에게는 그 작품에 대해 통달하고 한결같은 어떤 능력이 있다. 그게 바로 권위다. 보좌를 만든 고대인들처럼 고흐는 바로 이런 권위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바라는 길을 가지 않는다고 등을 돌린 아버지에게도, 또한 피를 보기까지 온통 통제하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선배에게도, 억압하려는 권력만 있을 뿐 달관하고 일관된 그런 권위는 없었다. 

 

울고 있는 어른

 

고흐는 죽기 전 2년 동안 '빈 의자'를 열심히 그렸다. 지상의 어디서도 그 의자에 걸맞은 진정한 권위를 보기 힘들었다. 참 어른이 없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위선자들, 질투와 시기의 눈으로 꼬투리 잡아 숙청하는 혁명가들, 뭔가 선심 쓰듯 던져주고는 더 큰 잇속을 챙기는 선동가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죽던 해 고흐는 남겨두었던 '빈 의자'에 한 사람을 앉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휑한 머리를 숙인 채 <울고 있는 노인>. 그 어른을 찾기까지 고흐는 빈 보좌를 남겨두었다. 

고흐가 떠난 지 100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참된 어른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더 나이 들고 머리가 하얗게 세거나 빠지더라도 그 마음은 더더욱 간절할 것이다. 그렇게 시대의 아버지가 절실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되었다. 권위를 기다리며 그가 비워둔 '보좌'에는 이제 그의 권위가 빛난다. 

 

                      나는 세상에 많은 빚과 책임을 지고 있다. (...)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 빈센트 반 고흐, <<편지>>에서

 

우리의 비워둔 '보좌'에 이런 어른을 모시고 싶다. 한평생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이런 어른이 되기 위해 산다면, 우리도 그때까지는 한구석에 '빈 의자'를 남겨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