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두운동회>, 소설집<<아버지의 땅>>, 임철우, 문학과지성사, 2018(3판) (1)

빨간차무다리아줌 2022. 5. 18. 20:40

--- 1950년 7월 28일 금요일 새벽 4시

 

  바닷가 그 작은 마을을 난데없이 쩌렁쩌렁 울려대기 시작한 그 요란한 노랫소리에 놀라, 주민 2천여 명은 약속이나 한듯이 거의 동시에 잠자리에서 벌덕 일어났다.

  아무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시골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날이 밝기 한두 시간 전인 그 시각은 너나없이 달고 곤한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때마침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밤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으며, 바람 또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간밤 늦게까지 극성이던 물것들도 새벽녘 한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뜸해지고, 선창 맞은편 작은 무인도의 울창한 수풀 속에선 늙은 부엉이도 울기를 멈춘 지 오래였다. 이따금 풀섶에선 지친 풀벌레의 울음이 잔뜩 목에 잠겼고,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물결이 차르르 차르르 기슭을 핥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런 어느 순간, 느닷없이 웬 요란하고 당돌한 소음이 그 깊은 정적을 깨뜨리며 아직 짙은 어둠에 혼곤히 잠겨 있는 온 마을을 우렁우렁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즈음 연일 계속된 무더위에 시달리느라 대부분 얇은 셔츠 바람이거나 아예 웃통을 훌훌 벗어젖힌 알몸뚱이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얼결에 놀라 후닥닥 눈을 뜬 그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그 난데없는 소동이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를 가려보느라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아마도 그 소란 통에 맨 먼저 귀가 벌어진 쪽은 잠이 없는 늙은이들이었을 테고, 뒤이어 아직 힘깨나 남은 젊은 축들이 코를 골다 일어나 곁에 누운 아내 혹은 남편을 황급히 흔들어 깨웠을 터이며, 아이들이란 본디 잠이 깊은 까닭에 맨 나중에야 깨어나 이불을 머리꼭지까지 훌렁 뒤집어쓰거나 놀란 울음부터 애앵 터뜨리거나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돌연한 소동을 접한 짧은 순간에 이 마을 8백여 주민들이 최초로 경험한 것은 바로 놀라움과 당황이었다. 때문에 지금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급작스러운 소동의 내막에 대하여 그들 모두는 저마다 각양각색의 상이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바다 쪽에서 날아오고 있는 함포사격이나 총소리라고 생각했고, 혹은 마른번개와 뇌성벽력이 몰아치는 게 아닌가 여긴 늙은이들도 있었으며, 또는 엉망으로 술에 취한 남정네들 수십여 명이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고 또 뭔가를 쿵쿵 두드리며 왁자하니 노래를 불러대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멋대로 추측해버린 여자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생각은 대부분 산더미처럼 어마어마하게 크고 힘센 탱크가 마을 큰길을 지나가고 있다는 데에 일치했는데, 그건 필시 그들이 탱크나 장갑차 따위를 아직 한 번도 구경 못 해보고 소문으로만 들어온 까닭이었을 터이다. 

  물론 그중엔 비교적 정확하게 판단을 내린 사람들도 몇은 있었다. 큰길가 약방집 둘째 아들이 그중 하나였다. 올해 스물 네 살인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회지에서 대학에 다리고 있다더니,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마을로 돌아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얼굴이 양초같이 희고 몸집이 여자처럼 가냘픈 그는 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좀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그가 너무 많은 책을 읽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이날 새벽의 괴이한 소동이 총성과 사내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몇 대의 대형 트럭이 난폭하게 신작로를 달려 다니며 만들어내는 소리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 유일한 인물이었다. 

  정말이었다. 정체불명의 수많은 사내들이 트럭에 올라탄 채, 마치 누군가에게 잘 들어보라는 양 일부러 질러대는 그런 악다구니만 같은 노래를 목청껏 고래고래 부르며 마을 곳곳을 부릉부릉 내달리고 있었다. 서산 너머로 기울어가는 조각달이 그 침입자들의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내줄 뿐, 그 몇 대의 대형 트럭이 난폭하게 질주해대는 마을 신작로엔 쥐 새끼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트럭 뒤 칸에 탄 사내들의 철모며 손에 쥔 소총의 쇠붙이 부분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무엇 때문인지 그들은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손바닥을 두들겨대면서도 연신 수상쩍은 눈길을 서로 주고받으며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입술 사이에서 유난히도 허연 치아가 무슨 발광체처럼 불길하게 빛나곤 했다. 

  방 낭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 이따금 차바퀴가 왈캉왈캉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따쿵따쿵 날카로운 총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때마다 총알이 금방 제집 흙바람벽을 뚫고 날아들 것만 같아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싸쥔 채 이불 속에서 납작하니 엎드리곤 했는데, 그것이 실은 전혀 엉뚱하게도 하늘을 향해 공포를 쏘아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 물정에 눈이 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세. 기쁨으로 해방 전선에 목숨을 바치자아......"

 

  육중한 트럭의 바퀴 소리와 간간이 하늘을 찢어발기는 총성과 함께, 사내들의 노랫소리는 마을의 골목과 골목, 지붕과 지붕 사이를 함부로 헤집고 다니며 사람들의 단잠을 두들겨 깨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둥그렇게 눈알을 뒤집어 까고, 마른침을 꿀꺽 삼켜가면서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남포등을 켜기 위해 성냥을 긋지 않았으며, 감히 방문을 열어본다든가 혹은 무슨 일인가 싶어 토방 위의 고무신을 꿰어 신고 사립문 쪽으로 나가본다든가 하는 무모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수숫대마냥 목이 뻣뻣하게 굳은 채 깜깜한 방 안 한구석에서 쿵쿵쿵, 저마다의 가슴 뛰는 소리만 헤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