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빛깔을 결정짓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 즉 불에 굽는 작업은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공들이 저마다 애를 써 보지만, 가마 속의 나무는 두 번을 똑같이 타는 법이 없었다. 그릇을 굽는 시간의 길이, 함께 넣어서 굽는 그릇의 개수, 그날 바람이 부는 방향…. 이런 수많은 요인들이 유약의 가장 마지막 빛깔에 영향을 미쳤다.'(136쪽)
'불, 그리고 폭포. 이것들은 늘 똑같으면서 늘 변하거든.'(233쪽)
6학년 대상 슬로우리딩 도서로 추천 받은 작품. 재미 교포 작가 린다 수 박의 작품으로 미국 아동문학상인 존 뉴베리 메달을 받았다. 작품 속에 묘사된 청자의 모양을 검색해 보니 국보 114호 청자상감 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과 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이 나온다. 작품의 배경이되고 있는 지역인 강진의 청자박물관에서 흙을 만지며 청자를 만들어 본 경험이 책을 읽는데 큰 재미를 더해주었다. 현대에 재현이 되고있다고는 하지만 청자 본래의 빛깔은 우리에게 전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청자들을 보아도 모두가 같은 빛은 아니다. '늘 똑같으면서 늘 변하는' 수많은 필연같은 우연들의 조합이 청자의 '좀처럼 잡히지 않는 파도의 초록 빛과 푸른 빛'. 이를 만드는 도공 민영감의 우직하고 섬세한 노동과 이를 통해 도자기가 빚어지는 광경을 '기적'으로 체험하는 주인공 '목이'의 강직함 같은 것이 요즘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암호처럼 맴도는 시몬 베유의 '노동의 신비'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목이가 진흙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수비' 기술을 배우고 민영감이 가르쳐 주지도 않는데 몰입해 경험하면서 전하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목이는 진흙을 한번 더 거르는 동안 스스로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어떻게 해서 그런 꿈을 꾸고 진흙에 대한 비밀을 손에 쥐게 됐는지도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숭고' 체험. 신을 영접한 것과 같은 체험일거다. 그런 목이에게 민영감이 "너한테 품삯을 줄 여유는 없어"라는 말이 '좋다'로 들리고 그 밑에서 땀흘리며 하는 고생이 진정한 '일'이 된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왕궁에서 먹는 저녁밥도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이 조촐한 음식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직접 일해서 번 음식이었다.' 품삯도 받지 않고 하는 어린 목이의 노동을 그 모양만 보면 다분히 '노동 착취'요 '열정패이의 강요'로 보기 딱이다. 시몬 베유의 이야기도 그렇고 린다 수 박의 이야기도 그렇고 노예와 같은 노동의 처지를 기꺼이 감내하고 모든 것을 바쳐 복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 '숭고'의 체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밖에 없다. '아름답거나' 아니면 '신성하거나' . 그 외 어떤 존재도 노동자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 어린이 동화책 한 권으로 많은 생각들이 피어오른다. '가마 속의 나무는 두 번을 똑같이 타는 법이 없다'고 했는데 미래 세계의 AI는 어떻게 말할까? 두 번 똑같이 타는 법도 있다고 알아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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