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사유 7

노란 민들레, 정여민 시집 <<마음의 온도는 몇도일까요?>> 에서

어린이 자료실에서 있다 보니 잊고 지난 시간들이 앞에서 뛰노는 듯한 느낌에 빠질 때가 많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조용히 음악도 흐른다. 아이들은 마법천자문과 카카오 프렌즈, 쿠키런을 이리저리 들고 돌아다닌다. 정여민의 시는 참으로 고요하다. 민들레 한 송이를 눈앞에서 힘차게 피워낸다. 이젠 스무 살이 넘을 거라고 한다. 지금은 무엇에 다독다독 말을 건네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 노란 민들레 돌담 돌아가는 길 봄 햇살 끝 노란 민들레가 피었다 돌멩이가 많은 거친 땅에서 힘들게 꽃..

꽃의 사유 2023.07.03

희망, 김기림 - 갈릴레오가 잊어버린 또 하나 별의 이름(김기림 시선), 깊은샘, 1992.에서

희망 - 김기림 희망 --- 갈릴레오가 잊어버린 또하나 별의 일흠 숨이 가뿐 봄밤 젊은이 꿈속에 즐겨뜨는 기이한 버릇을 한 별아 오늘밤도 네 인력의 한계를 스치어 자조 삐뚤어지는 서투룬 포물선들 온갖 회오리바람과 유혹과 협박에 휩쓸려 시달리는 운명 우에 희미하게 걸리는 원광 아-- 나는 오늘 차디찬 운성의 무덕을 디디고 나의 항성 나의 희망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 데가 있다. 스캔 떠 둔 김기림 시집을 읽다가 바로 이 시 아래서 결혼하기 전 아마도 25년은 넘었을 메모를 발굴하듯 발견했다. 서로가 20대 젊은 시간을 보내던 9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공원에 불던 바람이 오랜 시간을 뜷고 느껴진다. 파란 저녁이었다. '---는 말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마치, 외진 그늘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

꽃의 사유 2022.05.13

포인세티아의 꽃말은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53번째 맞이하는 새로운 해. 속도는 갈수록 오르고 몸은 거듭될수록 무거워진다. 남편과 나는 새벽에 내렸다는 눈 얘기 끝에 서로의 정신없는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웃는다. 이틀이 지나고 있다. 벌써. 이루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 하기도 순간, 어김없이 숫자 '1'이 시작되고 어김없이 새해가 떠올라 주니 겸연쩍지만 희망을 가져 본다. 우습게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말이 생각이 나면서 늘 그렇듯이 음력 설이 있는 것이 그저 고맙다.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합니다'로 꽃말을 일러주는 어느 블로거의 응원에 내게,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포인세티아를 그려 인사를 보냈다.

꽃의 사유 2022.01.02

천사인 것은, 자크 프레베르, 오생근 옮김 - 시집《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에서

천사인 것은 천사인 것은 이상한 일이야 천사가 말했다 당나귀라는 것은 바보 같은 거야라고 당나귀가 말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 천사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상하다는 것은 뭔가를 의미하지 바보 같은 건 이상한 것보다 더 이상한 거지 당나귀가 말했다 이상한 일이 있어 천사는 발로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이상한 이방인 당나귀는 말하고 가버렸다. Être ange c’est étrange Jacques PRÉVERT Recueil : "Fatras" Être Ange C’est Étrange Dit l’Ange Être Âne C’est étrâne Dit l’Âne Cela ne veut rien dire Dit l’Ange en haussant les ailes Pourt..

꽃의 사유 2021.11.18

꽃잎2, 김수영

꽃잎2 김수영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꽃의 사유 2021.10.22

꽃에 대한 예의, 황인숙

꽃에 대한 예의 유독 꽃을 버릴 때가 되면 곤혹스럽다 재활용은 안 될 테고 일반쓰레기 봉투랑 음식물쓰레기 봉투 어느 쪽에 버리는 게 마땅한지 망설이다 종종 동네 화단 덤불에 슬쩍 얹어 놓곤 했다 때가 되어간다 이미 지났을지도 바닥까지 말랐을 것이다 물을 부어주는 게 왠지 계면쩍었던 때가 그때였을까? 꽃병 속에서 시든 꽃이 말라간다 낱낱 꽃잎들과 꽃가루가 식탁 위와 방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다 전날도 아니고 전전날도 아니고 오래전 화장 얼룩덜룩 빛바랜 꽃이여 유독 꽃을 버리는 건 버릇이 되지 않는다 버릇처럼 피어나 버릇처럼 시드는 꽃을

꽃의 사유 2021.09.12

장마 개인 날, 이용악 - 해오리 난초

2020년 긴 장마가 끝난 9월 어느 날 하늘. 그치려나 싶던 비가 멎고 홍해가 갈라지듯 구름이 열어젖히는 틈이 푸르디 푸르다. 아들이 찍은 사진. 그 아이의 기쁨과 함께 하고파 그렸다.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어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이용악의 시, '장마 개인 날'. 김용택은 《머리맡에 두고 읽는 시》에서 '배고프지'는 동물적인 굶주림이나 허기가 아니라지만 나는 이 싯구를 읽으면 "엄마, 밥 줘"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배가고픈데 와서 무릎에 엎디어라 하는 가난한 시인의 맘이 아프기도하다.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어도', 심통을 부리고 뚱하니 핸드폰만 들여다 보며 대꾸가 없어도, 안경도 벗지 않고 자고 있어도 그냥 좋기만한 존재, 나의..

꽃의 사유 202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