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일에 대하여

영혼의 욕구(les Besoins de l'Ame) , 시몬 베유

빨간차무다리아줌 2020. 10. 27. 21:25

뿌리내림-인간에 대한 의무 선언의 서곡, 시몬 베유 지음,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3.

 

도입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이세진님의 번역을 그대로 읽으며 원문을 대조해 보았다. 아, 정말 어렵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인간 존중에 대한 개념을 개인의 차원에서 다신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뿌리내림

 

I . 영혼의 욕구

 

    의무 개념은 권리 개념보다 우선한다. 권리 개념은 의무 개념에 종속되며 상대적이다. 권리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통해서만 효력이 있다. 어느 한 권리의 실현은 그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어떠어떠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타자들에게서 온다. 의무는 인정받으면 바로 효력이 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의무도 그 존재의 충만은 전혀 잃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권리는 별 가치가 없다.

    인간에게 한편으로 권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의무가 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않다. 이 단어들은 관점의 차이를 드러낼 뿐이다. 권리와 의무의 관계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 그 사람 자체로 고려되는 인간에게는 오직 의무만 있다 그중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다. 1>그의 관점에서 바라본 타자들에게는 오직 권리만 있다. 그도 타자들의 관점에서 고려될 때에는 타자들이 그에 대한 의무를 스스로 인정하기에 권리가 있다. 인간이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면 그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의무는 있을 것이다.

    권리의 개념은 객관적 차원에 있으며 삶과 현실이라는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다. 이 개념은 의무가 사실의 영역으로 내려갈 때 나타나고, 그 후에도 항상 특정한 상황과 현상에 대한 고려를 어느 정도 포함한다. 권리는 언제나 어떤 조건들과 결부된 것으로서 등장한다. 의무는 그 자체로 무조건적일 수 있다. 의무는 모든 조건들을 넘어선2> 영역에 있다. 그 영역은 이 세상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1789년의 사람들은 그 같은 영역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사의 현실만을 인정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권리 개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절대 원칙들을 수립하고 싶어 했다. 그러한 모순 때문에 그들은 언어와 관념을 혼동하는 우를 번했는데, 그 과오는 오늘날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에 대해 적잖은 책임이 있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의 영역은 사실들로써 조건화되는 영역과 다르다. 그 영역에는 다른 관념들, 인간 영혼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과 관련된 관념들이 거한다.

    의무는 인간들을 이어 주기만 한다. 집단3> 그 자체에 대한 의무는 없다.그러나 집단을 구성하고, 집단을 위해 일하고, 집단을 이끌거나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는 집단과 관련된 삶의 일부에도, 집단과 상관없는 다른 부분에도 분명히 있다.

    동일한 의무가 모든 인간을 한 데 이어 준다. 비록 동일한 의무도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행위들로 이어지지만 말이다. 어떤 인간도,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어떤 상황에서든, 죄 없이 빠져나올 수 없다. , 참된 두 가지 의무가 실제로 양립 불가능한 경우는 예외다. 이 때에 인간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저버릴 수밖에 없다.

     사회 질서의 불완전성은 이런 유의 상황들을 얼마나 많이 동반하느냐로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의무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어느 한쪽의 의무를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부정한다면 그건 죄다.

    인간사의 영역에서는 의무의 대상이 항상 인간 그 자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조건은 하나도 더 추가되지 않더라도, 심지어 당사자가 그런 의무를 전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인류 모두에 대한 의무는 존재한다.

    이 의무는 사실상의 상황이나 관례에 기초하지 않는다. 관습이나, 사회구조나, 알력 관계나, 과거의 유산이나, 소위 역사가 나아갈 방향에도 기초를 두지 않는다. 어떠한 사실 상황이 의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의무는 어떤 협정4>에 기초하지 않는다. 모든 협정은 그 협정을 체결하는 관계자들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사람들의 생각과 뜻의 변화가 없으면 무엇 하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의무는 영원하다. 이 의무는 인류의 영원한 운명에 부응한다. 오직 인간에게만 영원한 운명이 있다. 인간들이 구성하는 집단에는 그런 운명이 없다. 또한, 그런 집단에 대해서도 영원한 성격의 직접적 의무는 없다.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의무만이 영원하다.

    이 의무는 무조건적이다. 이 의무가 기초해 있는 그 무엇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 의무는 그 무엇에도 기초를 두지 않는다. 어떤 조건에도 매이지 않는 의무로는 인간사와 관련한 의무가 유일하다.

    이 의무는 비록 토대가 없으나 보편 의식의 합의를 통하여 검증된다.5>우리에게 전해 오는 가장 오래된 문헌들 중 일부에도 이 의무는 나타나 있다. 이 의무가 자신의 이해관계나 정념과 상충되지 않는 모든 특수한 경우에서는, 하나같이 이 의무를 인정한다. 우리의 진보는 이 의무와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가늠된다.

    이 의무에 대한 인정은 막연하고 불완전하게 표현된다. , 사례에 따라, 이른바 실정법을 통하여 다소간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실정법이 이 의무와 모순을 일으킨다면, 바로 그 선에서 실정법은 부당한 것이 된다.

    이 영원한 의무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부응하지만, 그 운명을 직접적 목표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외부의 행위들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의무의 목표도 될 수 없다.

    인간이 영원한 운명을 지닌다는 사실은 오직 한 가지 의무만을 부과한다. 그것은 존중6>이다. 의무는 존중이 실제로 표현된 때에만 허구가 아닌 현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실현은 인간의 지상적 요구들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

    그점에 관한 한, 인간의 의식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수천 년 전의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나는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을 향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너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모두들 진보가 일단은 인간 사회가 더는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붙잡고 일반적인 말로 물어보라. 먹을 것을 잔뜩 가진 사람이 자기 집 문간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그 사람이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배고파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 때 외면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영원한 의무다. 이것은 가장 명백한 의무로서 모든 인류에 대한 영원한 의무들의 목록을 만드는 데 표본이 될 수 있다. 이 목록이 아주 엄밀하게 수립되려면 이 첫째 본보기에서부터 유비적인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에 대한 의무들의 목록은 굶주림처럼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하는 인간 욕구들의 목록과 상응해야 한다.

그러한 욕구들 가운데 어떤 것은 굶주림과 같은 신체적 욕구. 이 욕구들은 나열하기가 어렵지 않다.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주거, 의복, 난방, 위생, 질병 치료의 욕구들이 그렇다.

    어떤 욕구들은 신체적 삶과는 무관하며 정신적 삶7>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욕구들도 신체적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것이요,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신체적 욕구들이 그렇듯,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욕구들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차츰 죽음과 다소간 비슷한 상태에 떨어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순전히 식물인간 같은 삶에 가까워진다는 얘기다.

    이 욕구들은 신체의 욕구들보다 훨씬 하나하나 가려내고 꼽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욕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한 인간의 자유, 혹은 모국의 자유는 신체적 욕구가 아니지만, 정복자가 피지배민에게 저지르는 오만 가지 잔혹한 짓거리, 학살, 상태, 조직적인 수탈로 인한 기근, 노예살이, 대규모 강제 이주는 다 같은 종류의 조처들로 간주된다. 누구나 세상에는 신체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잔혹행위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인간에게서 영혼의 삶에 꼭 필요한 양식을 박탈하는 잔혹 행위들이 그렇다.

    의무는 무조건적이든 상대적이든, 영원하든 가변적이든, 인간사에 직접관여하든 간접적으로만 관여하든, 모두 예외없이 인간의 생에 꼭 필요한 욕구들에서 파생된다. 이 사람, 저 사람, 어느 특정인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의무들은, 음식이 인간에게 담당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물들을 대상으로 한다.

    우리는 밀밭을 존중해야 한다. 밀밭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밀은 인간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집단8>을 존중해야 한다. 조국이든 가족이든, 어떤 집단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집단이 어떤 이들에게는 영혼의 양식이 되는 까닭이다.

     이 의무는 현실에서 다양한 상황에 따른 다양한 행위와 태도를 낳는다. 하지만 이 의무 자체는 만인에게 동일하다.

특히, 외부에 있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동일하다.

     인간 집단들을 드높이 존중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각 집단은 유일무이하다. 한 집단이 파괴되어도 대체는 불가능하다. 밀 자루 하나는 또 다른 밀 자루로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집단이 그 구성원들의 영혼에 공급하는 양식은 온 우주를 통틀어도 등가물을 찾을 수 없다.

     둘째, 집단은 그 연속성에 힘입어 이미 미래에 침투해 있다. 집단은 산 자들의 영혼은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장차 세상에 올 이들의 영혼에도 양식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역시 연속성에 의해 집단은 과거에 뿌리를 둔다. 집단은 죽은 자들이 쌓아올린 영적 보물을 보존하는 유일한 기관이요, 죽은 자들이 매개 삼아 산 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전달 기관이다. 지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이 운명을 온전히 자각할 수 있었던 자들의 빛나는 광휘다.

      이 모든 것을 이유로, 위기에 빠진 집단에 대한 의무가 전적인 희생을 수반하는 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단이 인간보다 우선한다9>는 얘기는 아니다. 또한, 절망에 바진 한 인간을 구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전적인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도움 받는 인간이 어떤 우위성10>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농부는 상황에 따라서 밭을 일구느라 피로, 질병, 심지어 죽음의 위험에까지 노출된다. 하지만 그는 단지 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둔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적인 희생이 요구될 때라도 음식에 대한 존중과 비슷한 유의 존중 그 이상은 어떠한 집단에도 바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역할이 뒤집히는 경우 많다. 어떤 집단들은 양식이 되기는커녕 되레 영혼들을 잡아먹는. 이 경우에는 사회가 병든 것이니 치료를 도모하는 것이 첫째가는 의무. 상황에 따라 외과 수술을 방불케 하는 방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도 집단 내 구성원들이나 외부인들이나 그 의무는 동일하다.

     또한 집단이 그 구성원들에게 양식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개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영혼을 먹어 치우진 않지만 양식도 공급하지 않는 죽은 집단들이 있다. 그 집단들이 확실히 사망했다면, 일시적 혼수상태가 분명 아니라면, 그런 경우에 한해서는 집단을 폐지해야 한다.

     음식, 수면, 온기에 대한 욕구들이 신체의 삶에 그러하듯 영혼의 삶11>에 반드시 필요한 욕구들부터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겠다. 그 욕구들을 나열하고 정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절대로 그 욕구들을 욕망, 변덕, 별난 바람, 악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한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분별해야 한다. 인간은 쌀이나 감자 그 자체가 아니라 먹을 것을 필요로 한다. 나무나 숯이 아니라 땔감이 필요한 것이다. 영혼의 욕구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르지만 등가적인 충족들, 결국 동일한 욕구에 부응하는 충족들을 알아보아야 한다. 또한 영혼의 양식과 독을 분별해야 한다. 그 독이 한동안은 양식을 대신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연구가 없으면 정부들은 좋은 의도를 품고도 아무렇게나 우발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1>Un homme, considéré en lui-mê̂me, a seulement des devoirs, parmi lesquels se trouvent certains devoirs envers lui-mê̂me. (한 사람 자체를 놓고 보면 그에겐 오로지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다.)

2>au dessus de ~ 위에, ~을 초월하여

3>les collectivités : 공동체, 집단, 단체(=communauté, groupe)

4>convention

5> cette obligation a non pas un fondement, mais une vérification dans l’accord de la conscience universelle.

6>le respect

7> la vie morale

8>collectivité : 공동체, 집단, 단체,공동체의 일원 (=communauté, groupe), 공공단체, 공유

9>au dessus de l’ê̂tre humain(인간을 초월해, 인간 위에)

10>supériorité

11>la vie de l’â̂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