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과 숲속, 도서관 두 개를 다니다 보니 책 숲을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었다. 역시 숲속에서 배가를 하다가...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드라이브 마이 카 43쪽)
라는 말에 꽂혀서 평소 수필 정도 읽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세에라자드 214쪽)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여자없는 남자들 330쪽)
여자를 잃어버린 남자들의 냉소적인 우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 모여 있다. 내가 남자가 아니니 그것을 잘 그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 판단할 도리가 없다. 작가가 제시해 준 음악을 통해 그가 잃은 여자의 의미와 여자 없는 남자들의 감성을 추측해 볼 뿐이다. 인터넷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글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이 음악을 통해 실마리를 얻는다.
테디 윌슨, 빅 디킨슨, 벅 클레이턴 같은 풍스러운 재즈가 때때로 간절히 듣고 싶었다. 견실한 테크닉, 심플한 코드, 연주하는 것 자체의 소박한 기쁨, 기막힐 정도의 낙천주의. 지금 기노가 원하는 것은 그런,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음악이었다.(기노 261쪽)
남자가 잃어버린 여자는 이런 종류의 음악과 같은 것일까. https://youtu.be/WLcdCssqbmY
엠에 대해 내가 지금도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음악'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곧잘 흐르는 그런 음악 - 즉 퍼시 페이스나 만토바니, 레몽 르페브르, 프랭크 책스필드, 프랑시스 레, 101 스트링스, 폴 모리아, 빌리 본 같은 유의 음악들. 그녀는 (내 생각으로는) 무해한 그런 음악을 숙명적으로 좋아했다 . 유려하기 하기 짝이 없는 각종 현악기, 산뜻하게 떠오르는 목관악기, 약음기를 붙인 금관악기,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하프 소리. 절대로 무너지는 일 없는 차밍한 멜로디, 설탕과자처럼 착 감기는 하모니, 적당하게 에코를 살린 녹음.
나는 혼자서 차를 운전할 때 곧잘 록이나 블루스를 들었다. 데릭 앤드 더 도미노스나 오티스 레딩 도어스 같은. 그러나 엠 은 그런 건 절대로 틀지 못하게 했다. 항상 엘리베이터 음악 카세트테이프 열두 개 정도를 종이봉투에 담아와 손에 잡히는 대로 틀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정처도 없이 드라이브하고, 그동안 그녀는 프랑시스 레의 <13jours en France>에 맞춰 나직이 입술을 움직였다.
책속에 여자를 잃은 남자들만 아니라 나도 이런 류의 음악을 듣지 않은지 오랜 것 같다. 내속의 아니무스도 이런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건."언젠가 엠이 말했다." 스페이스의 문제야."
"스페이스의 문제?"
"그러니까, 이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거든. 그곳은 정말로 넓고, 칸막이 같은 것도 없어. 벽도 없고 천장도 없어.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아무 생각 안 해도 되고, 아무 말 안 해도 되고, 아무 일 안 해도 돼. 단지 그곳에 있기만 하면 돼. 그냥 눈을 감고 스트링스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기면 돼. 두통도 없고 수족냉증도 없고 생리도 배란기도 없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아름답고 평안하고 막힘이 없어. 그 이상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천국에 있는 것처럼?"
"응." 엠은 말했다. "천국에서는 분명 BGM으로 퍼시 페이스의 음악이 흐를 거야.
엠이 지금 천국 - 혹은 그에 비견되는 장소-에서 <A Summer Place>를 듣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칸막이 없는, 넓고 넓은 음악에 부드럽게 감싸여 있으면 좋겠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건 흘러나오지 않으면 좋겠다(하느님이 아마 그렇게 까지 잔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대한다). 그리고 그녀가 < A Summer Place>의 바이올린 피치카토를 들으며 이따금 나를 떠올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많이는 바라지 않는다. 설령 나는 접어두더라도, 엠이 그곳에서 영겁불후의 엘리베이터 음악과 함께 행복하게, 평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여자없는남자들333쪽)
작품 속에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음악은 이런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일원으로서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현재로서는. 아마도. (여자없는남자들의 마지막 문단)
'아마도'라는 무책임하고 신뢰할 수 없는 단어로 끝나는 글. 구분을 하고 선을 그었는데 그 경계에 서게 되니 선택을 해야 한다. 경계를 넘거나 넘지 않거나 꼼짝 않고 그대로 있거나. 그대로 있는 방법도 적어도 두 가지 있다. 우물쭈물 경계에 서 있거나 경계를 지워버리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닐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결국 구분과 경계를 지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 상태. 권태. 무기력. 자신의 감정조차도 타인에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는 오히려 남자가 아닌가 한다. 남자들의 여자되기가 요즘 문화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남자들에게도 무척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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