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간단한 질문, 헤밍웨이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빨간차무다리아줌 2021. 7. 30. 15:11

간단한 질문 A Simple Enquiry

 

밖에는 눈이 창문보다도 높이 쌓였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오두막의 송판 벽에 붙은 지도를 비췄다. 태양은 높게 떠올랐고 쌓인 눈 위로 햇빛이 흘러들어왔다. 참호는 오두막의 트인 쪽을 따라 굴착되었다. 맑은 날이면 햇빛은 벽을 비췄고 그 반사열이 눈을 녹여 참호를 더 넓혀 놓았다. 때는 3월 말이었다. 소령은 벽에 바짝 붙인 책상에, 그의 부관은 다른 책상에 앉아 있었다.

소령의 두 눈 주위에는 두 개의 하얀 동그라미가 나 있었는데 눈에 비치는 햇빛의 반사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스키용 안경 때문이었다. 나머지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게 되었다가 그 검은 부분이 다시 햇볕에 그을렸다. 코는 부풀어 올랐고 물집이 났던 자리의 피부는 축 쳐졌다. 문서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왼쪽 손가락을 기름 담긴 접시에 집어넣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그 기름을 자기 얼굴에 펴서 발랐다. 그는 접시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비벼서 기름을 잘 걸러내어 손가락에 꼭 필요한 양만 묻히려고 매우 신경 썼다. 그는 이마와 볼에 기름을 펴 바르고 손가락 사이로 아주 섬세하게 코를 매만졌다. 다 발랐다고 생각하자 소령은 일어나 기름접시를 들고 오두막에 마련된 자신의 작은 침실로 갔다. "잠깐 자고 오겠네." 그가 부관에게 말했다. 이곳 군대에서 부관은 임관 장교가 아니었다.  "마무리는 자네가 짓게."

"네, 소령님." 부관이 대답했다. 소령이 떠나자 그는 의자에 기대 하품을 했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보급판 책을 꺼내 펼쳤다. 이어 책상에 책을 내려놓고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문서 작업을 끝내야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책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었다. 밖을 보니 해가 산 너머로 사라졌고 더는 오두막의 벽에 햇빛이 비치지 않았다. 이때 병사 하나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길이가 일정하지 않게 잘라진 소나무 가지들을 난로 안에 집어넣었다. "살살해, 피닌." 부관이 병사에게 말했다. "소령님 주무시잖아."

피닌은 소령의 당번병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청년 병사는 난로를 손보고 조심스레 소나무 가지들을 정리하고서 문을 닫고 나가 오두막 뒤로 갔다. 부관은 문서 작업을 계속했다. 

"토나니." 소령이 불렀다.

"예, 소령님."

"피닌 보고 내 방으로 오라고 해."

"피닌!" 부관이 불렀다. 피닌이 방으로 들어왔다. "소령님께서 오라고 하신다."

피닌은 오두막의 큰 방을 지나 소령의 방문 앞에 섰다. 그는 반쯤 열린 문을 두드렸다. "소령님 찾으셨습니까?"

"들어와. 문은 닫고." 소령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부관에게 들렸다. 

방에 들어서니 소령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피닌은 침대 옆에 섰다. 소령은 여분의 옷을 꽉 채워 넣어 배개처럼 만든 배낭에 머리를 대고서 누워 있었다. 그의 길고, 검고, 기름진 얼굴이 피닌 쪽을 향했다. 그의 양손은 모포 위에 놓여 있었다. 

"열아홉이랬나?" 소령이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사랑해본 적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령님?"

"사랑해본 적 있냐고, ...... 여자랑 말이야."

"여자들을 만난 적은 있습니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잖아. 여자랑 사랑에 빠진 적이 있냐고."

"예, 소령님."

"지금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자넨 편지도 안 쓰잖아. 내가 네 편지를 다 읽고 있어."

"그녀를 사랑하지만 편지를 쓰진 않습니다." 피닌이 말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토나니." 소령이 조금 전과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자네 지금 내 말 들리나?"

옆방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듣지 못하나 보군." 소령이 말했다. "자네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 정말 확실하지?"

"확실합니다."

"그리고 넌 타락하지 않았나?" 소령은 피닌을 재빨리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타락이라니?"

"좋아." 소령이 말했다. "너무 잘난 체할 필요 없어."

피닌은 방바닥을 내려다봤다. 소령은 피닌의 햇볕에 탄 얼굴을 본 뒤 눈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고는 그의 손을 쳐다봤다. 이어 소령은 웃음기를 싹 지우고 피닌에게 말했다. "자네는 정말로 그건 원하지 않는단 ......." 소령은 말을 멈췄다. 피닌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소령은 배낭에 다시 머리를 기대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로 안도감을 느꼈다. 군대 생활이란 너무도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넨 참 좋은 친구야. 정말로 그렇다고, 피닌. 잘난 체해서는 안 돼. 다른 누가 나타나서 자네를 업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피닌은 여전히 소령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 소령이 말했다.  그는 양손을 담요 위에 두고 깍지를 끼고 있었다. "난 자넬 건드리지 않을 거야. 원래 소대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하지만 내 당번병으로 남는 게 낫지. 죽을 확률이 떨어지니까."

"지시하실 것은 없습니까, 소령님?"

"없어.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갈 때 문은 열어둬."

피닌은 문을 열어둔 채로 방을 나섰다. 부관은 어색한 모습으로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피닌을 봤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이전에 소나무 땔감을 들고 들어왔던 때와는 몸가짐이 달랐다. 부관은 피닌을 눈으로 좇은 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피닌은 아까보다 더 많은 소나무 땔감을 가지고 들어왔다. 침대에 누운 소령은 벽에 걸린 천을 씌운 핼멧과 스키용 안경을 쳐다보며 피닌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저 작은 악마. 거짓말일지도 모르겠어. 소령은 생각했다. 

 

-------

 

헤밍웨이가 1927년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한 <여자 없는 남자들Men without Women>의 한 단편이다. 역자의 작품 해설에 의하면 헤밍웨이는 동성애자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작가연보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헤밍웨이가 그의 단편집 제목을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고 붙인 이유도 평소 좋아하던 소설가 키플링이 작품 제목을 인상적으로 잘 뽑는데 "키플링이 나에 앞서서 좋은 제목들을 모두 쓸어가 버려서 나는 그 책이 동성애 남자들과 여자 대학에 다니는 여대생들에게 잘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고 붙였다"고 피츠제럴드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고 하고 있다.  '헤밍웨이 비판자들은 숨은 동성애자일수록 남들의 동성애는 더욱 봐주지 못한다면서 헤밍웨이가 그런 경우일 것이라고 의심해왔고 또 그의 지나친 마초 이미지가 그런 사실을 과잉 보상하는 연막 장치가 아닐까 추측했다' 고도 한다. 읽다 보면 자신이 복제인간인 줄 모르는 블레이드 러너가 역시 자신이 복제인간인 사실을 모르는 레이첼을 심문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피닌의 대답에 안도감을 느끼는 소령은  '군대 생활이란 너무도 복잡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전쟁터의 참호는 아니어도 지금의 세상도 못지않게 복잡하다. 소령이 피닌의 말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한 '건드리지 않겠다'는 다짐도 거짓이 될 수 있고 부관 토나니가 소령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거짓일지 모르게 된다. 모든 대답이 거짓이 된다한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처럼 들어와 난로를 덥히는 피닌의 존재감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갈 때 문은 열어둬." 창문보다 높이 눈이 쌓인 추운 전장터에 그나마 온기를 놓치기 싫은 그들의 선택이다. 1920년대 전장터에서 수고한 남자들의 선택은 적어도 그런 우아함이 있네. 마치 소년 병사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활을 들고 선 여자 선수에게 총질을 해대는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들의 방이 얼어붙어 버린다는 걸 모르는지? 나는 그저 숏 컷의 멋쟁이 여대생 선수가 이 모든 혐오의 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하고 그저 부디 하던 일 계속해 나갈 수 있기를 멀리서 기도하는  한 사람이고 싶다.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아름다운 나라의 군인 정신으로 BTS 군면제도 좀 어떻게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