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덥고 밥을 먹으니 온몸이 노곤해 의자를 젖히고 앉았다. 10분 정도 쉬었다 나가자. 밖은 집들을 짓느라고 시끄러워 귀에 버즈를 꽂는다. 적당한 곡이 떠오르지 않을 땐 알고리즘에 의지한다. ‘Feel so good’ Chuck Mangione의 곡이 떠 있다. HQ라 붙은 리마스터된 9분 33초짜리다. 딱 좋아. 한 줄기 바람이 들려 온다. 눈을 감는다. 작정하고 긴장을 풀고 늘어지기로 한다. 소리가 참 좋아. 톡톡 튀는 드럼과 심벌즈 소리, 찰랑찰랑하는 기타 소리, 기분 좋은 리듬...
나의 사춘기는 이르고 길었다. 저녁을 먹으면 어디로든 들어가 박혀 있고만 싶었다. 식구가 많아 혼자 있을 곳이 없었던 때 쌀이나 잘 안 쓰는 물건을 쌓아 놓는 부엌방이 있었다.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아 추운 그곳에 라디오를 꼭 껴안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웅크려 앉아 있곤 했다. Chuck Mangione의 ‘Give it all you got’이 울리면 ‘황인용의 영팝스’가 시작된다. 그렇게 추운 방구석에서 멀리 바깥세상의 음악을 들으며 그런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는 상상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렇게 잘도 잊으며 살면서 이 기억만은 이리 생생한지 느닷없이 의아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안개 낀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기억해 이 풀냄새를. 기억해 외롭고 쓸쓸하고 촉촉한 이 길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단 한 번 남는 그 시간이 오면 꼭 기억해달라 했던. 추운 방에서 팝송을 듣던 그 시간도 함께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상상만 하던 바깥세상을 보았던 거였구나. 내게 꿈이 있었고 그 꿈은 이미 이루었던 거였네. 나는 늘 또 다른 바깥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야. 그렇게 일상처럼 꿈을 이루며 다른 세상으로 가겠지.
기분이 좋다. 9분 33초 전의 내가 멀게 느껴진다. 일어나 일하러 나간다.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배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그러나, 2017 (0) | 2021.10.29 |
---|---|
창조행위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 1987년 Femis 강의 (0) | 2021.10.17 |
간단한 질문, 헤밍웨이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0) | 2021.07.30 |
오직 마음이 당길 뿐인 활 (0) | 2021.07.29 |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4에서 (0) | 2021.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