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소리.
새벽녘의 짙은 어둠을 가르고 들려오는 그것은 처음 들어보는 전혀 생소한 곡조와 가사의 노래였다. 지금껏 사람들이 익히 들어온 군가들 중에 그런 노래는 없었다. 읍사무소 지붕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이따금 둔탁한 목소리로 쨍쨍 울려 나오던 그 노래도 아니고, 마을 앞 신작로나 학교 운동장에서 총을 멘 병사들이 척척척 군화 소리와 함께 행진을 하며 굵은 목소리로 입을 모아 부르곤 하던 그 군가도 아니었다. 물론 이날 새벽의 노래 역시 사내들의 둔중한 저음과 행진곡풍의 경쾌하고 힘찬 박자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왠지 그 생소한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주민들은 하나같이 당혹감과 놀라움으로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오를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틀림없는 적군의 노랫소리라는 엄청난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적군이다. 저, 적군이 드, 들어왔어!"
"뭐라구요. 바, 반란군이 들어왔다고요?"
사람들은 경악하며 그 믿기지 않는 사실을 저마다 그렇게 짧은 몇 마디의 말로 확인했다.
정말이지 너무나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거였다. 물론 아군이 차츰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풍문으로나마, 그리고 전황의 불리함을 애써 부인하면서도 어딘가 허둥대는 듯한 아군 병사들의 불안한 기색을 훔쳐보면서 주민들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급작스럽게, 더구나 이날 새벽에 돌연한 적군의 군가 소리를 듣게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문대로라며, 전투는 이 소음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어야 했다. 설사 아군이 계속 밀리고 있다 하더라도, 국토의 최남단인 이곳까지 닿으려면 최소한 열흘 혹은 그 이후가 되리라 여기고 있는 터였다. 때문에 머잖아 닥쳐올 전투에 대한 걱정과 함께 차츰 피난을 떠날 궁리를 하기 시작한 참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민들 마음은 그렇게까지 다급한 상태까지는 아직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지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도 없고, 또 해방군임을 자처한다는 반란군은커녕 그들이 입고 있는 군복 색깔조차 구경해본 적이 없는 마을 사람들로서는 아무래도 참혹한 전쟁에 대한 실감이 그만큼 덜할 수밖에 없었다. 또 바닷가 최남단의 소읍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어차피 피난이라고 떠나봤자 고작 바로 코앞에 흩어져 있는 연안의 자잘한 섬들에로의 일시적 이주에 그치고 말 게 빤하다는 사실이 그처럼 때아닌 느긋함을 갖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마을에 주둔 중인 아군 부대의 이즈음 상황을 두고 보더라도 별달리 눈에 띌 만 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던 터였다.
본디 인구 2천여 명 남짓한 이 소읍엔 경찰지서가 하나 있었고 그 근무 인원이라야 고작 10여 명에 불과했다. 워낙 조용하고 사건이 드문 작은 포구라서 그들의 할 일도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모자를 벗은 제복 차림에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부둣가를 오가며 이제 막 선창으로 뱃머리를 디밀고 들어오는 고깃배의 수염투성이 선원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는 서장이나 경관들의 모습을 으레 구경할 수 있었고,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막무가내 고집을 부리고 있는 꼬마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여자들은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경관을 가리키며 "저거 봐. 널 잡아가려고 순경 아저씨가 온다"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경관은 짐짓 가던 길을 멈추고 두 눈알을 제법 무섭게 부라려줌으로써, 아이의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들 줄도 알았다. 대부분 외지로부터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이 마을로 들어온 경관의 아내들은 으레 주민들의 후한 인심을 얻어 누리며 살 수가 있었다. 고기 잡는 철이 되면 심심찮게 생선을 구럭에 담아 들여보내거나, 생일이나 제사 때면 떡 접시며 음식 쟁반을 들고 서로 오며 가며 지낼 줄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사정이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일어났다는 놀라운 소식에 인심이 전에 없이 부쩍 흉흉해지기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작은 시골 읍내가 갑자기 지상군 및 해군의 보급 기지 역할에 적합한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면서부터 일단의 아군 부대가 내지로부터 이동해 와 주둔하게 된 때문일 터였다. 청색 전투복 차림을 한 그들은 여러 대의 대형 트럭에 실려 마을로 들어오더니, 읍사무소 건물을 모두 차지하고 얼마 전부터 거기서 지내는 중이었다. 5백여 명 남짓한 그 병사들은 각기 기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소총을 한 정씩 어깨에 걸고 있었는데, 선창, 마을 입구, 신작로, 그리고 언덕 위에 참호를 파놓고 아침저녁 교대로 경계 근무를 섰다. 읍사무소와 학교 운동장에 있는 게양대엔 아군의 청색 깃발이 펄럭였고, 병사들이 척척척척 군화 소리와 함께 대오정연하게 큰길을 행진해 지나갈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두려운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해내곤 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주민들을 읍사무소 앞 공터에 모두 모이게 한 다음, 부대장이라는 사람은 절대로 안심하고 있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에, 전선이 약간 후퇴해 내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에에, 놈들의 기세가 워낙 완강해놔서 우리 아군이 다소 주춤해 있는 사이에, 얼핏 초반의 형세가 약간 불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 하지만 조금도, 진짜로 조금만치도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군은 막강한 화력과 장비를 재정비하는 대로 즉각 반란군 놈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머잖아 곧 전선을 밀어 올리고 완전 소탕 격멸하여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2천여 애국 시민 여러분께서는 절대 동요하지 말고 각자 맡은바 생업에 전념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에에, 두고 보십시오. 전쟁은 금방 끝이 납니다."
개구리처럼 배가 튀어나온 그 부대장은 국기 게양대 앞 단상에 올라서서 불룩한 배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그렇게 장담을 했다.
하지만 연일 흘러드는 소문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도록 뒤숭숭한 것들뿐이었다. 전황은 갈수록 이쪽에게 극히 불리하게 진행되어가는 눈치였다. 전선은 그새 벌써 훨씬 아래쪽으로 야금야금 내려오고 있었고, 수도는 이미 오래전에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다고들 했다. 그러나 마을은 여전히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어디서고 총성은 들리지 않았고, 하늘은 쨍하니 맑았으며, 여름 해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바다는 잠잠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읍사무소에 주둔 중인 부대는 철수 준비는 커녕 그 비슷한 기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걸 지켜보는 주민들은 전쟁의 여파가 이곳까지 밀어닥치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 여유가 남아 있어서일 거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어코 이 바닷가 작은 마을에도 처음으로 심상찮은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사흘 전 저녁, 읍사무소 건물 남쪽 귀퉁이에서 작은 폭발물이 터진 사건이었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읍내엔 즉각 비상이 내려졌다. 범인을 색출해내기 위하여 경찰은 주요 건물을 수색하고 거리에서 행인들을 심문했다. 그리고 의심쩍은 사람들 여러 명을 체포했다. 그중에 최근에 도회지에서 돌아온 약방집 둘째 아들과 대장장이, 소금장수, 애꾸눈 구두 수선공도 끼여 있었다. 그들이 모조리 잡혀가고 난 다음, 사람들은 골목이며 한길가에 모여 웅성이면서 바로 약방집 둘째 아들이 폭탄을 만들고 그 사건을 주동한 우두머리라고들 수군거렸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똑똑하고 영특해서 동네에 인물 하나 났다는 소리를 들었던 그 청년은 어뚱하게도 도회지에 나가더니만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위험한 물이 들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잡혀간 사람들이 일단 죄가 있는 걸로 밝혀지면 머잖아 총살형을 받게 될 거라고도 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룻밤이 지나서, 그러니까 바로 어제저녁, 약방집 둘째 아들은 물론 함께 잡혀갔던 사람들 전원이 풀려나온 거였다. 조사한 결과 증거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라고들 했지만, 주민들은 저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 경찰은 진작부터 이 마을 주민들 중에 적군과 은밀히 동조하는 불순한 인물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주민들 역시 주변에서 일부 사람들이 뭔가 수상쩍은 일들을 은밀히 꾸미고 있다는 사실쯤은 어지간한 사람이며 누구나 어렴풋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벌서 몇몇 인물들은 큰길가 약방집 뒷문을 드나들며 목소리를 낮춰 저희들끼리 숙덕이다가 서둘어 흩어지기도하고, 남의 눈을 피해 밤늦게 골목을 돌면서 반란군을 찬양하는 내용의 조잡한 인쇄물을 집집마다 던져 넣고는 재빨리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사건을 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그 용의자들을 순순히 풀어주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여하간 그 사람들이 풀려나온 것은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녘이 되자마자 불시에 이렇게 적군이 밀어닥치고 말았으니, 대관절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싶어 사람들은 다들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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