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두운동회>, 소설집<<아버지의 땅>>, 임철우, 문학과지성사, 2018(3판) (3)

빨간차무다리아줌 2023. 3. 9. 21:35

"아이쿠 속았구나!"

소금장수와 푸줏간집 곰보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대장장이는 서 있는 채로 바지에다 쭐쭐 오줌을 누고 말았다. 

 

"허허허헛. 자아, 이제야 모두 끝났나 봅니다. 허헛. 본의 아니게도 죄 없는 여러분들이 십년감수하셨겠소이다. 우리 몇 사람은 사실 처음부터 빤히 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었지요. 우리인들 달리 어쩌겠습니까. 허허허. 이렇게 해야만 숨어 있는 불순분자들을 하나 남김없이 깡그리, 그것도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만들 수가 있다고들 하니 말입니다. 허허헛. 그래서 우리 관리들 몇은 어젯밤부터 모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각본대로 연극을 좀 해봤지뭡니까. 저분들은 사실 K시의 아군 부대 병사들이랍니다. 반란군 제복으로 갈아입고 감쪽같이 그럴듯하게 적군 행세를 한거지요. 읍사무소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이웃 마을에 잠시 철수해 있다가, 오늘 낮 12시 정각에 나타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는군요. 허허헛. 어떻습니까. 이거야말로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가 아닙니까. 힘 하나 안 들이고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잇게 된 것입니다. 허허. 벌써 다른 마을에서도 똑같은 방법을 써보았더니 그 효과가 아주 좋았다지 뭡니까. 으허허헛."

그때까지 고개를 떨어뜨린 채 꿇어앉아 있던 읍장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퍽이나 재미있는 놀이였다는 양 그렇게 설명을 해주고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는 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저 하나같이 입만 따악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이구, 여러분들께서 진짜 고생들 하셨습니다. 더구나 우리 읍장님과 조합장님은 아주 연기가 그럴듯하던데요. 하하."

"아유, 별말씀을. 하지만 이거, 아까 저놈한테 얻어맞은 자리가 아직도 욱신거리는구먼요. 허헛."

배불뚝이 부대장과 적군 제복 차림의 매부리코 장교가 새끼줄 오른쪽 칸으로 다가와 읍장과 몇몇 관리들에게 치하를 했을 때도 여전히 사람들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기분이었다. 

소금장수와 대장장이, 애꾸눈 구두 수선공과 푸줏간집 곰보 사내를 포함한 50여 명의 오나장 패거리들은 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적군 제복 차림의 병사들에게 꼼짝없이 붙잡혀서 한꺼번에 새끼줄 왼쪽 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뒤이어 묶여온 약방집 둘째 아들도 거기에 합류했다. 이번엔 그들이 오히려 양 손바닥을 머리 위에 얹은 채 무릎을 꿇려 앉혀졋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상황이 물구나무서기를 한 셈이었다. 

"어때, 이 반란군 놈들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기분이? 이제야말로 네놈들이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나왔으니,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 안 그래? 킬킬킬킬."

적군 제복 차림의 병사 하나가 총구를 그들 앞에 불쑥 들이대며 이죽거렸다. 킬킬킬킬킬 ...... 소금장수와, 약방집 둘째 아들과, 구두 수선공과, 푸줏간집 곰보와 대장장이는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시꺼먼 총구를, 눈도 코도 없이 동그랗게 입만 달린 채 길길길길 웃고 있는 그 총의 웃음소리를 꿈속처럼 아스라하니 듣고 있었다. 

"만세. 만세애. 만만세애......"

마침내 이번엔 느티나무 쪽으로부터 엄청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읍장과 우체국장, 그리고 정미소집 주인 사내와 읍장의 뚱뚱보 아내를 비롯한 느티나무 쪽 사람들은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기막힌 환히와 감격을 도저히 주체할 길이 없어 눈물 콧물을 쭐쭐 흘려대며 미친 듯 발을 구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순간 전까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그 소름 끼치는 공포와 처참한 고통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만 환희와 기쁨으로 전율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육체와 영혼을 그토록 엄청난 힘으로 짓누르고 있던 그 죽음의 족쇄를 실로 자연스럽게 새끼줄 너머 저쪽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통쾌한 복수를 실현했다. 그리하여 그 가슴 벅찬 희열과 감격을 한층 더 충만한 은총과 축복으로 승화시켰다. 

"세상에, 간밤의 꿈이 이렇게도 맞을 수가 있담!"

정미소집 사내는 간밤의 그 기이한 꿈을 새삼 떠올리며 아내를 부둥켜안았다. 예배당 종지기 집사도 목사의 팔을 붙들고 엉엉 울음을 쏟았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금방까지 기도를 했던 목사는 너무 충격을 받은 탓인지 즉석에서 기도문의 내용을 수정하여, "주여, 악을 능멸하시고 의인을 구하시옵는 아버지시여, 감사하옵니다. 진실로 진실로 감사드리옵나이다"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끝내는 목구엉으로 치솟아 오르는 감격을 억누르지 못하고 목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만세 만세 만만세'를 목청껏 외쳐대기 시작했다.

한편, 그런 순간에도 오히려 멀뚱해져 있는 쪽은 교문 근처에 따로 떨어져 있는 노인들과 아이들이었다. 거기까지 달려와서 미처 그 내막을 알려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여전히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저만치 운동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희한한 광경을 입을 벌린 채 지켜보고 있던 정미소집 열 살짜리 막내아들의 눈에는, 그것은 영락없이 청군/백군이 한데 모여 운동회 날의 흥겨운 폐회식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필로그

얼마쯤 세월이 흐른 뒤에 전쟁은 끝이 났고, 바닷가 그 작은 마을에도 민첩한 도둑처럼 다시 평화가 숨어들어왔다. 그동안 마을 주민의 전체 숫자는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줄어들어 있었지만, 그 부족한 자리를 채우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자들은 부지런히 아이를 낳았으며, 갓짝을 맺은 젊은 부부들은 주인 없이 오래 버려져 있던 빈집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을 지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래도 해마다 7월 어느 날이면 마을의 꽤 많은 집들에선 한꺼번에 똑같이 제사상이 차려지곤 했지만, 무심한 세월은 사람들의 쓰디쓴기억의 잔에다가 조금씩 조금씩 맹물을 타 넣어주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그들은 어느 해 한여름 대낮의 그 기괴한 곡두 놀으므이 기억을 뇌리에서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부터인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은 가을날을 잡아 마을 서쪽 바닷가의 학교 운동장에선 예전처럼 다시 운동회가 열렸고, 그때마다 온 마을 주민들은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한바탕 열띤 응원을 벌이며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다가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손뼉을 치다 말고 제풀에 화들짝 놀라며 돌연 겁먹은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흘끗흘끗 훔쳐보곤 했는데, 아직 어린 꼬마들은 도통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