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칼같은 글쓰기 : 프레데릭 이브 자네와의 대담, 아니 에르노 지음, 최애영 옮김, 문학동네, 2005.

빨간차무다리아줌 2024. 9. 4. 22:13

얼결에 글을 쓰고 있는 나. 틈틈이 더 공부해야 한다. 스완 모튼 10A 칼날 메스로 날 오려 내는 듯한 아니 에르노!

6-7. 표면적으로 그녀의 책은 투명해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과정의 어려움과 해독의 난맥이 조금도 생략되지 않은 채, 이야기의 흐름 자체 속에서 환기되고 은연중에 현재(現在)하고 있다. 나는 은유 없는, '효과'를 추구하지 않는 그녀의 문장을 좋아한다. 그녀의 문장들은 서로 부딪치는 부싯돌의 날카로움으로 살아 있는 살점을 생으로 도려내고 살갗을 벗겨낸다.

8. 나는 극점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쥘 베른의 아트라스 선장처럼 남들이 뭐라 하든 우회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안일해지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려주고 가르쳐준 것을 모방하기보다는, 반대로 그것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마음에 품지 말라고 설득했던 것을 마침내 실현해내고, 그리하여 어떤 돌파구를 찾을 것을 스스로에게 의무로 부과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향한 돌파구인가? 과연 그것을 알아주기나 할까? 아마도 진실을 향한 것이리라. 바로 우리의 진실 말이다. 

(2002. 6.28.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28. 여기서 관건은 '나'를 말하거나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조건이나 고통 등과 같이 더 방대한 어떤 리얼리티 속에서 '나'를 상실하는 것이거든요. 내 초기 소설의 형태와 비교할 대, 나는 어떤 엄청난, 다라서 당연히 경이로운 자유 앞에 선 느낌을 받습니다. 내가 허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하나의 지평선이 사라지고, 형태상의 모든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42. 우리에게는 어떤 수치스러운고통, 누구에게도 고밸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고통이 있어요. 그리고 또다르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으 내가 아버지의 꿈이었던 사회적 신분 상승을 실현한 다음, 일 주일간 가족과 함께 지내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를 급작스럽게 잃게 된 고통이엇죠. 그 무렵 나는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어요. 다르세상으로 넘어간 것이죠. 그 우월감에서 오는 거만한 말투라니... 난 내 아버지에 대해, 즉 소상인이 된 시골 농부의 삶의 궤적과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글을 써야 했어요. 그것도 그 고통에 대한 생생한 추억에 상응하는, 정당한 한 권의 책을 말이에요. ... 1977년에 백 페이지가량의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소설을 계속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 소설을 쓰는 내내, 내가 위선을 떨고 있다는 느김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에요. 당시에는 글스기와 목소리의 어조가 이전에 발표한 책들에 비해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던 만큼, 그러한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982년에 나는 한 가지 어려운 성찰을 밀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6개월 정도 지속된 성찰이었지요. 장 주네가 말한 것처럼, '적의 언어'로 글을 쓰는, 지배자들에게서 글쓰기 기술을 '훔쳐와' 사용하는 서민 출신 화자로서의 내 상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이러한 성찰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겉으로는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는 하나의 생애, 바로 내 아버지의 생애를 떠올리는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 (내 아버지와 나를 배출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 즉 지배받는 자들의 세상을) 배반하지 않는 하나뿐인 정당한 방법은, 정확한 사실을 통해, 내가 들은 말을 통해 그 생애의 리얼리티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가족 민족학 연구를 위한 요소들'...오직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화하는 방식..."평평한 글쓰기"...

45. 글을 쓰기 전, 내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어떤 소재, 추억, 직관적인 전망, 감정 등이 있을 뿐이죠.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며(이것들만이 사물들을 존재하게 하고, 단어들을 잊어버림으로써 사물들을 '보게' 할 것입니다), 실재에 대한 글쓰기라고 내가 느끼는 것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57. 내 삶의 암흑지대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샅샅이 기억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내 과거는 그 자체로서는 내게 특별한 흥밋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독특한, 그러니까 전적으로 유일무이하다는 의미에서의 독특한 존재로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 성적 경험과 결정 그리고 다양한 어법의 총합으로서, 끊임없이 세상(과거의 세상이든 현재의 세상이든)과 소통하고, 독특한 주관성 -- 그럼요, 물론이죠 -- 을 형성하는 전체로서 나 자신입니다.  하지만 좀더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현상이나 메커니즘을 재발견하고 들춰내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주관성을 사용합니다. 솔직히 이 표현방식이 맍고스럽지는 않군요. 때대로 나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한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사물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싶다." ......58. 내가 열망하는 이상적인 글쓰기는, 타인들 - 다르 작가들, 그러나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 이 내 안에서 생각하고 느꼈듯, 내가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73. 프루스트, 셀린의 작품들처럼 20세기 전반의 주요 작품들의 연속 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단절ㅇ르 표시하는 뭔가 다른 것이 생성되고 있어요. 초현실주의자들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나는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가 우리 현대성을 말하는 최초의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74. 때로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이 있을 뿐... 루소의 <고백록>, 브르통의 <나자>, 카프카의 <소송>,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86 좌파와 우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지상의 모든 국민과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조건의 불평등 - 여기에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도 덧붙이겠어요 - 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죠. 좌파를 지지하는 것은 개인이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면서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뭔가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일이 단순히 개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파 전망의 바탕에는 불평등과 강자의 법칙과 적자생존, 다시 말해 현재 전 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에서 적용하는 그 모든 것을 용인하는 입장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도처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주의를 필연으로 제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파의 태도이자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자유주의를 선택함으로써 프랑스의 좌파정부는 우경화되었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의식을 상실해버렸지요. 

93.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삶에서 일으키는 총체적 혁명에 관한 하나의 전망이며,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리고 또한 격분이기도 하죠. 

97. 내 생각에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세상의 베일을 벗기고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기존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활동입니다. 늘 내게 충격적인 것은 대중뿐 아니라 작가들과 비평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는 거예요. 즉 문학은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작가의 상상계가 개입되는 순수 미학적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작가의 바로 옆집에 사는 이들이 중산층이나 부유층으로 분류되어도, 작가의 상상계는 모든 사회적 결정을 비켜갈 것이라는 생각이죠. 

100. 난 더이상 아름다운 무엇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엇을 우선으로 하고 싶어하게 되었지요. 글쓰기는 리얼리티- 어린 시절에 겪은 서민사회의 리얼리티, 출신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는 새로운 문화 적응의 리얼리티 그리고 여성의 성 리얼리티...'비합법적' 언어 행위들을 운반하는 어휘와, 서민들이 구사하는 문장구조를 사용하는 아주 난폭한 글쓰기...

102. 바르트는 어디선가 말한 바 있습니다. "글쓰기는 작가가 자기 언어의 본질적 성격을 어느 사회 영역에 위치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영역을 선택하는 것이다."

104. 내 글쓰기의 다양한 양상은 이러한 정치적 차원과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즉 허구와 자전적 허구에 대한 거부가 문제되기 때문이며, 반복하는 말일 테지만 글쓰기가 '문학과 사회학과 역사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글쓰기를 현실에 대한 탐구로 간주하는 나의 비전이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108. ...어느 작가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이 점에 관해 내게 인상적인 것은, 내 존재의 형성과 나의 청소년기를 대변하는 것들에 영향을 미친 책들이 꼭 아름다움과 힘을 지닌 텍스트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133. 우선 내게 페미니즘은 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것은 경험한 어떤 육체, 어떤 목소리, 어떤 담론, 어떤 사는 방식들로서 존재했지요. 바로 내 어머니의 것들이죠. 읽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자요, 여성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일들의 전적인 부재, 바느질과 요리에 소질 없는 것, 여성의 학업과 물질적 독립의 중요성 등...내 출신성분이 피지배 사회계층이라는 사실과 여자아이들에게 인위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부과하는 이중적 무게가 내게는 무척 무거었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싶군요. 

147.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148. 글쓰기를 행하면서 어떤 위험을 무릅써볼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앞서 그 위험에 대해서 은연중에 암시한 바 있어요. 그 위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상상적이긴 하지만 나의 글쓰기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이라고요.

152. 포기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이 끊임없는 투쟁을 대가로 치러야 해요. 한편으로는 가정과 직장을 양립시켜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쓰기 자체에 내재하는 난관과 부딪쳐야 했던 만큼, 나를 분산시키는 것이 여러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때문인지, 글 쓸 시간과 힘과 능력이 내게 부족해서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더군요. 

154. 난 간결한 문장을 쓰기 위해 더없이 느리게 글을 쓰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러한 숙고, 그러한 글쓰기 방식, 그러한 간결성은 물질적 조건, 다시 말해 이제 진정 내 것이 된 더할 나위 없는 자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9. 글쓰기를 어떤 역사적 형태하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글쓰기를 지킴으로써 나 자신을 구워하는 것이었어요. 

       글쓰기가 싫증나고 역겨워지거나 내게 좌절감을 주지는 않아요. 하지만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들고 계속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일지 않으면, 그 뒤에는 글쓰기를 못하겟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난 이것을 데뷔 시절에 대한 노이로제라고 불러요. 종종 거기서 심리적 차단이 오기 때문이죠. 이것에 어떤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필요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요...그저 하나의 징후라고나 할까요.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러니 뭔가 다르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그런 징후 말이에요. 내가 한번 말한적이 있는 그 작업장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모물러 있는 것들로 가득해요. 하지만 이제 난 그것이 일시적 미완이자, 미래에 행할 작업의 초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답니다. 

165-166. 난 존재들과 사물들을 대변하는 배우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주어진 한 회사와 시간 속에서 그러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 그래요, 난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거기 있다고 느낍니다. 나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도 거기 있다고 느낍니다.

173. 모든 단어는 특히 그것들이 실제의 말을 옮겨 적은 것일 때 수많은 의미를 적재합니다. 단어들은 한 장면의 색깔과 그것에 내포된 고통, 생경함 혹은 사회적 폭력을 "하나로 결집시킵니다. 

177. 내겐 또다른 진행방식이 있는데, 점점 더 그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진행방식이라는 표현이 그리 적합한 것 같지는 않군요. 그만큼 의지나 집중력이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죠....무의식적인 전략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군요, 말하자면 한권의 책이 될지 어떨지 모르는 채 '작업장'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이죠.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의 공간 안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러 있기 위해서입니다 내용과 형태, 그리고 고안의 자유를 위해서 말이죠. ... 목적 지향성 없는, 어쨌든 나 스스로 의식한 뚜렷한 목적이 없는 그러한 '자유로운 글쓰기'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178 난 글을 쓸 때 내가 단어가 아닌, 사물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추상ㅈ거일 수 있는 감정, 혹은 그와 반대로 기억에 떠오르는 장면이나 이미지처럼 구체적일 수 있는 것들과 만난다는 말이죠. 단어들은 내가 찾지 ㅇ낳아도 내게 오거나, 아니면 반대로 노력이 아닌 어떤 극도의 긴장을 , 정신적 표상에 정확히 부합하기 위한 긴장을 요구합니다. 문자으이 리듬에 관해 말하자면, 난 의도적으로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내 내면의 귀로 듣고, 옮겨 적을 뿐이지요. 

196. 이제 글쓰기는 하나의 존재방식이 되었어요. 요컨대 글쓰기는 실현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 종교에서는 '저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진실로 취급되는 모든 것이 내게는 여기, 오직 여기 있을 뿐입니다. 계시되는, 주어지는 진실은 없습니다. 다른 삶, 즉 종교가 삶 저 너메에 위치시키는 다른 삶을 나는 과거에 위치시킵니다. 그것은 체험된 삶이며, 우리가 사랑을 통해, 미리 정해지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는 삶입니다. 나는 허무의 바탕 위에서 유물론적 방식으로 살고 생각하고 느낍니다.게다가 이 방식은 어떤 흔적에 대한 증언을 역사에 남기도록 나를 부추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 이유도 소용도 없이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라는 증언말입니다.

200.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글쓰기가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도래하게 하는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글스기에는 공포 도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201. 해야 할 일이나 장봐야 할 물건 목록에서 차례로 줄을 그어 나가듯 문제를 점차적으로 청산한다는  관점에서 글쓰기를 바라보는 태도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초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글쓰기는 초월할 수 없는 문제, 사회, 가족, 성의 문제가 펼쳐지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3. 어떤 순수한 나, 다시 말해 타인들과 법과 역사가 그 속에 현재하지 않는 순수하게 나일 뿐인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밀한 것은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은 사물이고 물질이며, 외부입니다. 그것이 내 감정이든 내 육체이든 내 생각이든, 혹은 지하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든 마찬가지입니다.

204. 어쩌면 내밀하고 개인적인 텍스트일수록 더욱 보편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