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도서관에서 마련한 양성평등주간 기념행사 온라인 저자강연회. 김영주 선생님의 주제에 선명하게 보이는 말 '며느리사표'. 화요일 예정이던 강의가 강연자 사고로 일요일 2시로 급히 옮겨졌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부로서 그 말은 즉, 강의를 들으려면 월차를 내던지 연가를 내던지 아님 사표를 내라 아니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들어라 그런 소리로 들렸다. 그래 온라인 강의니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며 듣든 무슨 상관이람. 휴일이라 아침도 늦어지고 그래서 점심도 늦어지고, 어머니는 참고 참으시다 토요일 시장을 다녀오시며 손주놈 해주라고 떡볶이 재료를 사오셨다. 결국 강의는 남편과 함께 장을 보러 가던 차안에서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도 나왔고, 어느 커리어 우먼의 첫 시댁생활과 어김없이 차례나 제사 모시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코로나 때문에도 명절을 어떻게 하나 고민 많은 시기에 나는 나대로 강사의 말에 심정적으로 너무 공감이 되어서 남편은 어머니와 마누라의 노선을 어떻게 접목시킬까 머리가 복잡해져서 서로 심사가 온통 뒤집어지고 슬슬 혈압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이좋게 의논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지만 믿고 자라온 관념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아버지는 추석을 간신히 버티시고 정확하게 일주일 뒤에 돌아가셨다. 나는 상을 치르며 생일을 맞았다. 결국, 나는 내 생일에 시아버지 차례상 아니면 제사상을 준비하게 되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상을 준비하는 문제도 정리하기 힘든데, 생일날 그 노릇을 해야 하는 내 맘을 진정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못된다. '며느리 사표'는 쫄보라 엄두도 못내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인 저항으로 '착한 사람' 되기를 포기한 것 같다. 결국 강의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유튜브를 정지시키고 부랴부랴 장을 봐서 매콤 달다구리한 떡볶이를 만들어 늦은 점심을 해 먹었다. 설겆이를 하는 남편도 말이 없고, 나는 방에 처박혀서 책꽂이와 책상을 정리하고 지난 영수증들을 박박 찢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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