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50

Feel so good

날은 덥고 밥을 먹으니 온몸이 노곤해 의자를 젖히고 앉았다. 10분 정도 쉬었다 나가자. 밖은 집들을 짓느라고 시끄러워 귀에 버즈를 꽂는다. 적당한 곡이 떠오르지 않을 땐 알고리즘에 의지한다. ‘Feel so good’ Chuck Mangione의 곡이 떠 있다. HQ라 붙은 리마스터된 9분 33초짜리다. 딱 좋아. 한 줄기 바람이 들려 온다. 눈을 감는다. 작정하고 긴장을 풀고 늘어지기로 한다. 소리가 참 좋아. 톡톡 튀는 드럼과 심벌즈 소리, 찰랑찰랑하는 기타 소리, 기분 좋은 리듬... 나의 사춘기는 이르고 길었다. 저녁을 먹으면 어디로든 들어가 박혀 있고만 싶었다. 식구가 많아 혼자 있을 곳이 없었던 때 쌀이나 잘 안 쓰는 물건을 쌓아 놓는 부엌방이 있었다.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아 추운 그곳에 ..

일상다반사 2021.08.12

간단한 질문, 헤밍웨이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간단한 질문 A Simple Enquiry 밖에는 눈이 창문보다도 높이 쌓였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오두막의 송판 벽에 붙은 지도를 비췄다. 태양은 높게 떠올랐고 쌓인 눈 위로 햇빛이 흘러들어왔다. 참호는 오두막의 트인 쪽을 따라 굴착되었다. 맑은 날이면 햇빛은 벽을 비췄고 그 반사열이 눈을 녹여 참호를 더 넓혀 놓았다. 때는 3월 말이었다. 소령은 벽에 바짝 붙인 책상에, 그의 부관은 다른 책상에 앉아 있었다. 소령의 두 눈 주위에는 두 개의 하얀 동그라미가 나 있었는데 눈에 비치는 햇빛의 반사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스키용 안경 때문이었다. 나머지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게 되었다가 그 검은 부분이 다시 햇볕에 그을렸다. 코는 부풀어 올랐고 물집이 났던 자리의 피부는 축 쳐졌다. 문서 작업을..

일상다반사 2021.07.30

오직 마음이 당길 뿐인 활

아침부터 땀이 흐르고 햇살이 찌르고 밖의 공사 소리가 창문을 뚫고 시끄럽다. 귀에 버즈를 꼽고 더 크게 음악을 튼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음악을 들으며 일을 본다. 문득 잠이 깬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허벅지를 얇게 기른 손톱으로 꼬집어 본다. 엄마도 오늘 약타러 오기로 했다가 날도 뜨겁고 또 코로나가 시끄럽게 한다며 서울 올라올 약속을 미뤘다. 하늘도서관을 다녀오며 빌린 다섯권의 책을 펼쳐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단편집에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빌려 읽은 헤밍웨이의 단편집 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란 걸 알았다. 해설 부분을 부랴부랴 읽다보니 해가 저물었다. 그래 여름 밤의 산책 좋겠다 싶었다. 나가봐야지 하고 보니 한 달을 쌓아 놓은 쓰레기들이 꼬깃꼬깃 쌓여..

일상다반사 2021.07.29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4에서

나팔과 숲속, 도서관 두 개를 다니다 보니 책 숲을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었다. 역시 숲속에서 배가를 하다가...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드라이브 마이 카 43쪽) 라는 말에 꽂혀서 평소 수필 정도 읽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을 읽기 시작했다.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세에라자드 214쪽)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여자없는 남자들 330쪽) 여자를 잃어버린 남자들의 냉..

일상다반사 2021.07.09

나는 귀머거리다, 라일라, 2015 에서

'아무 소리 없는 어둡고 깜깜한 이 밤 갈 곳을 잃고 헤매이는 작고 여린 나의 우주선' 하고 시작하는 강형호의 "유니버스"라는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산다는 것이 그런 막막함을 헤치고 나가는 것이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숲속에서 반납으로 들어오는 책들을 소독 티슈로 닦다가 제목이 '나는 귀머거리다'라서 뭔가 저항적인 글인가 싶어 펼쳐 보니 귀여운 캐릭터로 그려진 만화기에 또 멍때리고 서서 읽기 시작했다. 정말로 '아무 소리 없는'우주에서 사는 주인공 라일라의 이야기는 뭐랄까 '나'라는 우주선이 정말 얼마나 작은지, 그 작은 우주선을 타고 떠나 나온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느끼게 해준다. '상처(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리'하는 랭보 시구를 써서 도서관 프로그램 기획 목적을 썼더니 단번에 웃음이 터져 ..

일상다반사 2021.07.07

김영하, <<보다·see·見>>을 읽다가 문득

열심히 책을 서가에 꽂아 넣다가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문득 "남편이 너무 애기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하고 묻는다.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그냥 얼버무리고 다시 책을 꽂는 것에 몰두했다. 지금도 모르겠다. 나이 50이 넘었는데 남편에게서 아이 같은 모습을 보면 더 사랑스럽지 않나? 작은도서관시스템 운용법 연습하다가 빌려온 김영하의 를 읽다가 이날의 일이 문득 떠올라 옮겨본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고 병든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

일상다반사 2021.06.14

'冊'과 '책', 이태준,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덕수궁에서

2020년이 앙드레 브르통과 수포가 함께 한 가 출판된지 1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전시를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초현실주의의 발명 : 부터 까지'라는 제목으로 연다고 한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8월까지 한다니 엉덩이가 들썩들썩 비행기표 찾아보고 있을 소식이다. 요즘은 이렇게 인터넷이 있고 SNS로 실시간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 행사나 예술 흐름을 듣고 누릴 수 있다지만 1920년대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학 예술인들이 어떻게 장콕도나 달리 등의 초현실주의 작품이나 르네 클레르의 영화를 알고 즐겼을까? 나는 요즘 언젠가 다녀온 두물머리에서 한여름 당당하게 피어있던 연꽃을 30호 틀에 그리고 있는 중이다. 우연히 김홍주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로 보았다. 그는 세필로 젯소 처리 하..

일상다반사 2021.05.30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덕수궁에서

내리던 비가 그쳐 반갑고 멀리 보이는 궁과 나무는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고 자동차 소리를 물리치고 문득 들리는 새소리에 고개를 돌려 귀기울였다. 백석 시의 삽화가 내가 읽으며 머리 속에 그렸던 장면보다 더 현대적이고 멋이 있어서 놀랐다. 세 번을 예약하고 취소하고 반복하다 드디어 50+작은도서관활동가과정 수료 기념으로 혼자서 ㅎㅎ. 복잡하던 마음을 토닥토닥해준다.

일상다반사 2021.05.22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까운 것이다. (...) 물은 다투지 않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없다(도덕경 8장)'. ''다투지 않다'. 그의 공적에 대하여 어떤 인정을 받으려고 다투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고, 낮은 자리에 처하여 있지만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남과 다투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다(≪영어 세대를 위한 노자 도덕경≫의 해설)'. '공적에 대한 인정', '높은 자리', 물은 그런게 뭔지도 알지 못하고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그러고 있는 것이 좋을 뿐이렸다. 나는 물과 같은 도(道)를 사는 도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크게 멀지만 물처럼 사는 것이 분명 행복일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누..

일상다반사 2021.05.05

일을 시작하기 앞서 하는 다짐

'휴식을 위해 꼭 어딘가를 찾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아침 저수지에 산오리들이 내려와 천천히 수면에 미끄러지는 풍경을 상상해 보세요. 큰 나무 아래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 있는 풍경을 상상해보세요. 시원한 폭포 아래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해 보세요. 제주도 오름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그곳이 어디든 내가 원한다면 돌아오지 않고 오래 머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인 것에 지배되지 않도록 할 일입니다. 몸과 마음의 고단은 몸과 마음의 어둠을 부릅니다.(...) 다만 내 삶의 리듬은 내가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자주할 일입니다. 지금 나를 이곳에 데려온 당사자는 바로..

일상다반사 202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