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초상>,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6.

빨간차무다리아줌 2024. 8. 28. 14:11

기억의 초상

 

모든 것이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다. 

둥그런 두상, 얼굴의 윤곽, 키, 그리고 실루엣.

하지만 그 사람과 닮지 않았다. 

자세가 이게 아니었던가?

색채의 배합이 잘못되었나?

마치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포즈였나?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면 어떨까? 

그의 책? 혹은 누군가에게 빌려온 책을?

지도를? 망원경을? 낚싯대를?

뭔가 다르 옷을 입혀야 하는 게 아닐까?

1939년 9월의 군복을/ 아니면 수용소의 줄무늬 죄수복을?

그때 그 시절의 옷장에서 꺼낸 바람막이 점퍼를?

아님 --- 마치 반대편 해변으로 헤엄치는 중인 것처럼 --

그의 발목까지, 무릎까지, 허리까지, 목까지 

물에 잠겨 있다면? 알몸으로?

그의 뒤에 배경을 그려 넣는다면?

미처 제초를 못한 푸른 풀밭을?

덤불을? 자작나무 숲을? 구름이 가득한 수려한 하늘을? 

그의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 사람과 언쟁 중이었을까? 아니면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나?

카드 게임을 했나? 술을 마셨나?

몇 명의 여자와 함께 있었을까? 한 명이었나?

아님 창가에 서 있었던가?

문을 나서는 중이었나?

떠돌이 개를 옆에 데리고?

유대감이 강한 인파 속에 파묻혀 있었나?

아냐, 모든 게 다 아니라고.

그는 혼자여야만 해,

그게 가장 잘 어울리는걸.

하지만 이렇게 바짝 다가오는 건 아닌 듯한데?

멀리? 좀더 멀리?

화폭에서 가장 깊은 구석으로?

그가 소리를 지르다 해도

목소리가 미처 와 닿지 못할 먼 곳으로?

그렇다면 전경에는 무엇을 배치한담?

흠, 그게 뭐든 상관없어.

막 창공을 날고 있는 한 마리 새만 

거기에 등장한다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프란시스 베이컨 자화상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