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번역가의 서재>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임슬애 옮김, 정중원 그림, 민음사, 2022)을 표지 그림 때문에 사 읽고 그 표지 그림을 그린 사람에 관심이 생겨 읽은 에세이가 이 <<얼굴을 그리다>>였다. 생각하고 보니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에 대한 관심을 키운 것도 이 책이었다. 요즘,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왜 그 생각을 하게 되었나 보니 이 책이 떠올라 다시 읽었다.
2부 마지막 글을 그대로 옮긴다. 404-429쪽.
실재와 재현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의 앞에 두 달 전 서거한 선왕의 유령이 나타난다. 그리고 엄청난 사실을 말해 준다. 자신이, 아우이자 햄릿의 숙부인 클로디어스에게 살해를 당했노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유령은 햄릿에게 자기 복수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햄릿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간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으니 당장 큰절부터 올릴 법도 한데, 햄릿은 유령을 결코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귀신'이나 '그것' 또는 '내 아버지의 귀신'이라고 호칭할 뿐이다. 그는 유령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선량한 신령인가, 저주받은 악귀인가,
몰고 온 것이 천상의 정기인가, 지옥의 독기인가,
그대의 의도가 악하건 선하건,
그토록 의문스러운 형상을 띠고 나타났으니,
나 그대에게 말하겠다......
햄릿은 결코 아버지와 아버지의 유령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의 철저한 이성은 재현이 실재에 종속된다는 전통적 위계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때문이다. 터럭의 색깔까지 생전 아버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햄릿에게 유령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존재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현현인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나타난 악귀인지 알 수 없는, 이 '의문스러운 형상'과의 조우로 말미암아 햄릿의 비극은 시작된다. 스스로 증거를 찾아 유령이 일러 준 말의 진위를 파악할 때까지 무모한 행동을 자제하는 햄릿의 태도를, 우리는 지금까지 우유부단함이라는 결함으로 부당하게 낙인찍었다.
초상화는 흔히 유령에 비유된다. 귀신 들린 저택에 걸린 초상화의 눈이 깜빡이는, 공포 영화의 오래된 클리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유령과 마찬가지로, 초상화도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 눈앞에 보여 주는 허상이자 일종의 불완전한 대체물이다. 그런데 햄릿은, 허상(유령)은 실재(아버지)의 어설픈 반영일 뿐이며 복제는 원본에 절대적으로 종속된다는 통념을 회의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유령은 선왕의 실재를 대리하지 않는다. CGI로 제작된 초상들이 전통적인 초상화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했다. CGI는 기존 이미지들을 참고하고 변형하며 눈속임을 일으킬 만큼 감쪽같은 허상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이미지는 원본의 아류로써, 또는 그것을 표상하는 지표로써 기능하지 않는다. 실재와 재현의 전통적 위계에서 벗어나, 원본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담한 복제물인 것이다. 이들은 햄릿이 말한 '의문스러운 형상'이자 원본이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다.
시뮬라크르란 복제의 복제,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의 허상을 뜻한다. 시뮬라크르가 작용하는 것을 일컬어 시뮬라시옹이라 하는데, 영어의 '시뮬레이션'을 떠올려 보면 조금 더 친숙할 것이다. 원본-복제 간의 철저한 위계를 고집했던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원본의 불완전한 아류이자 사이비로 보았다. 예컨대 오직 신만이 만들 수 있는 이데아 속 침대, 즉 침대의 '개념'이 원본이고 실재라면, 목수가 만든 현실의 침대는 그것을 한 번 복제해서 구현한 1차 재현물이다. 그리고 그 침대를 그린 그림은 이데아로부터 이미 한 차례 복제된 침대를 한 번 더 복제한 2차 재현물, 즉 시뮬라크르이다. 그것은 원본으로부터 두 단계 이상 두 단계 이상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본질이 아닌 외양을 눈속임하여 나타냈기에 거짓된 모사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복제가 반복되고 원본과 멀어질수록 등급이 낮아짐은 당연하다. 만약 사진을 복사기에 넣어 복사한 뒤, 복사되어 나오는 사진을 다시 복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복사물의 질은 점점 더 낮아질 터다. 판화를 찍어 낼 때 시리얼 넘버를 매기고, 그에 따라 가격을 차등적으로 책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시뮬라크르에 관해 다른 이야기를 들여준다. 기술과 미디어가 발전함에 따라 시뮬라크르는 과거와 전혀 다른 위상과 힘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이른바 '짝퉁'에 지나지 않았던 시뮬라크르는 어느 순간 원본과 대등한 존재로 진화하며 원본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날로그 복사기로 사진을 복사하는 과정이 전통적인 시뮬라시옹에 대응한다면, 이번에는 디지털 사진 파일의 복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디지털 파일로 저장된 사진을 수천 번, 수만 번 복사한들 복제된 파일들 사이에는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복제품들 간의 위계가 없을뿐더러 원본과의 차이도 없다.아니, 애초에 원본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여기서 원본과 복제 사이의 전통적 관계는 무너져 내린다.
잠시 앤디 워홀의 유명한 실크 스크린 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리지' 않고 '복제'했다. 워홀이 찍어 낸 마릴린 먼로의 얼굴들 사이에는 순서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과 얼마나 유사한가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분류법을, 원본 없이 상사한 이미들에는 적용할 수 없는 법이다.워홀의 작품들은 시뮬라크르의 변화한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워홀은 예술가, 또는 장인이 단 하나뿐인 원본을 만들어 내는 행위로는 '기술적 복제 이미지'의 시대를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작업실을 '아틀리에'가 아니라 '팩토리(공장)'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원본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한 시뮬라크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원본보다 더 강력한 실재성을 확보함으로써 이내 원본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도입부에서 보르헤스의 우화에 등장하는 지도 제작자들을 예로 든다. 지도 제작자들은 제국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에 착수하는데, 애당초 실제 영토의 어설픈 반영일 뿐이었던 지도가 점차 정교해지더니 급기야 제국 전체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덮어버리는 수준에 이르다. 보드리야르는 이 우화마저도 시뮬라크르의 특성을 설명하기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 실재를 전복하는 가상을 창조해 내는 작업이라고 역설한다. 영토에 맞추어 지도가 제작되지 않고 오히려 영토가 지도를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배적인 위상을 점유한 시뮬라크르들에 의해 형성되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가상의 세계를,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라고 불렀다.
하이퍼리얼리티
워차우스키 자매의 영화 <메트릭스>(1999)는 인간들이 현실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가상 현실 세계 '메트릭스'를 배경으로 한다.자신이 지금까지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았음을 깨달은 주인공 '니오'와 그를 현실 세계로 안내한 멘토 '모피어스'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게 실재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실재가 뭔데? 자네는 실재를 어떻게 정의하지?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볼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거라면, 실재란 단지 뇌가 받아들이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겠군."
실재를 정의하는 것이 실재 '성'이라면, 실재보다 더 강한 실재성을 지닌 가상이 등장했을 때 실재의 처지는 어떻게 될까. <매트릭스>는 결국 '하이퍼리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다. 여담이지만, 보드리야르가 하이퍼리얼리티의 개념을 소개한 <<시뮬라크라와 시뮬라시옹>>은 영화에서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이 책에서 보드리야르는 "가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실재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다시 정리하자면, 하이퍼리얼리티는 강력한 시뮬라시옹에 의해 형성되는, 현실과 환영이 구분되지 않는 가상 세계다. 하이퍼리얼리티 안에서 원본과 복제, 실재와 재현의 위계는 전복되고 경계는 무너져, 그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조차 가상과 현실을 뚜렷이 구분하지 못한다. 전통적 순서가 뒤바뀐 '이곳'에서는 원본이 복제를 베끼며 실재가 가상을 반영한다.호접지몽, 자신이 나비의 꿈을 꿨는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꿨는지 혼란스러워했다는 장자의 이야기는 하이퍼리얼리티 체험을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우화다.
하이퍼리얼리티는 공상 과학 영화나 철학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하이퍼리얼리티를 경험하고 있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SNS 가 대표적이다. 개인과 개인의 일상이 원본이라면, SNS 속 공간은 사진이나 글을 통해 개인이 스스로를 복제해 놓은 가상 세계다. SNS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떠올려 보라. 예컨대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과거의 나는 그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다.나의 일상이 먼저 있고 인스타그램은 그것을 반영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순서가 바뀌었다. 지금의 나는 거꾸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닌다. 나의 일상이라는 실재를 인스타그램이라는 가상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이다.관광지, 공연장, 쇼핑몰, 박물관 등 인파를 끌어모아야 하는 곳들은 이르바 '인증숏'과 '셀카'를 찍기 좋은 포토존을 앞다투어 마련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없는 경험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니다. 재현의 세례를 받지 못하는 실재는 파문당한다.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SNS속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강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SNS속에는 현실에서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더 많은 정보와 교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나는 항상 아름답게, 내 일상은 항상 완벽하게 연출될 수 있다. 차단 기능은 또 어떤가. 싫은 사람을 클릭 한 번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니, 현실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가!
하이퍼리얼리즘
'하리퍼리얼리즘'은 '하이퍼리얼리티'를 시각적으로 해석해 내는 예술 장르다. 커다란 캔버스에 친구의 얼굴을 가득 채워 모공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묘사한 척 클로스나 유리에 비친 반사체와 철문에 낀 녹까지 모조리 그려 내는 도심 풍경화가 리터드 에스테스, 거대한 크리고 확대된 인물상에 털을 한 올 한 올 심어 가며 사실적인 조형물을 제작하는 론 뮤엑 등이 대표적인 하이퍼리얼리즘 예술가로 언급된다. 인물의 얼굴을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려 내는 나의 작업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분류된다. 하이퍼리얼리즘 예술은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 같은 화제성 타이틀로 여러 미디어에서 자주 소개되 바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바 대중과 가장 친숙한 현대 미술 장르라 할 수 있다.
하이퍼리얼리즘 작품은 실물을 촬영한 사진을 복제한다. 때로는 내가 <호메로스>를 그렷을 때처럼, 여러 이미지를 조합해서 가상의 대상을 진짜처럼 구성해 낸다. 복제의 복제, 즉 전형적인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원본과 구분이 안 될 만큼 똑같거나 때로는 더 진짜 같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시각적으로 확장되고 증폭된 대상의 특성이, 화가의 연출에 따라 대형 화면 위에서 다시 한 번 과장되고 생략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극사실주의'는 하이퍼리얼리즘의 잘못된 번역이다. '극사실'이라는 단어는 사실의 극치, 즉 빼어난 사실성으로 풀이되며, 여전히 전통적 리얼리즘의 범위안에서 재현에 대한 실재의 우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극사실주의'로 불리면서, 하이퍼리얼리즘은 장인적 기술을 뽐내며 대상의 물성을 탐구하는, 다소 전통적인 장르로 자주 오인된다. 그래서 하이퍼리얼리즘 작품을 가지고 전시를 할 때면, 매번 같은 종류의 비판에 직면한다. '사진처럼 그릴 거면 카메라를 쓰면 되지, 왜 굳이 그림을 그리느냐?'라고 말이다.
그러나 하이퍼리얼리즘은 원본과 복제, 실재와 가상의 전복된 위계를 보여 주는 데 본래의 목적이 있다. 그림을 얼마나 정교하게 잘 그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과 그림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행위, 즉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어디까지가 실재인지 고민하도록 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방점이 있다. 사진이 그림을 따라 했는지 그림이 사진을 따라 했는지,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나마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메라가 있는데 왜 그림으로 그리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으로,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가 된다.
뒤바뀐 순서
하이퍼리얼리즘 초상화에서 기존의 순서는 뒤바뀐다. 전통적인 초상화를 바라보는 관객은 실물에 견주어 그림의 닮음 정도를 가늠하지만, 하이퍼리얼리즘 초상화에서는 실물이 그림에 견주어 비교당한다.실물을 눈으로 직접 볼 때는 미처 몰랐던 대상의 미세한 특징을 오히려 그림에서 발견하고, 결국에는 실물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게 된다. 친구의 얼굴을 1미터 넘는 캔버스에 몇 달에 걸쳐 그린 적이 있다. 친구가 연인과 함께 완성된 그림을 보러 왔는데, 그림을 한참 뚫어져라 바라보던 연인이 친구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른쪽 턱 밑에 점이 있었네? 그림 보고 알았어!
학부 졸업 작품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렸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대형 캔버스에 할아저지의 얼굴로부터 관찰해 낼 수 있는 모든 주름과 검버섯, 모공, 땀구멍, 터럭을 한 땀 한 땀 그려 냈다.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전시회 반응도 좋았고 영국에서 출간된 아크릴화 기법 총서의 도판으로까지 실렸다. 하지만 그림속 당사자인 할아버지는 마냥 기뻐하지 않으셨다. 내가 보기에도 그림이 무자비할 정도로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검버섯과 주름이 그림에서 얼마나 빼어난 조형 요소로 작용하는지, 할아버지 얼굴의 흔적들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얼마나 각별한 의미인지 설명을 드려도 큰 소용이 없었다.그린이 전시되었을 때도 할아버지는 가장 인적 없는 시간에 다녀가셨고, 그림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걸어 둘 곳이 없다."라며 거절하셨다.
결정적인 부분은 그다음이다. 몇 개월이 지나고 할아버지를 다시 뵈었을 때 할아버지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거뭇거뭇한 반점들이 모두 사라져서 피부가 깨끗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보다 더 젊어 보였다. 알고보니 친구분들과 함께 피부과를 찾아가서 레이저 시술로 검버섯을 전부 제거하셨단다. 시술을 받기로 결정한 계기가 내 그림이라고 대놓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연 내 그림이 없었더라도 스스로 피부과를 찾으셨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피구 미용 같은 문화와는 꽤 거리가 먼 분이셨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나도 형 그림 보고 피부과 갔잖아!'라며 갑작스레 고백을 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연예인 뺨치는 잘생긴 외모의 친구였고, 예전에 한 번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 준 적이 있었다.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전시장에 찾아와서 나와 함께 사진도 찍었고, 촬영한 그림을 페이스북 커버 이미지로 사용한 것도 보았기에, 나는 그가 그림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친구의 말인즉, 그림에 묘사된 인중의 거뭇한 수염 자국이 그렇게 거슬렸다고 한다. 안 그래도 숱이 많고 털이 뻣뻣해서 아무리 깨끗하게 면도를 해도 자국이 남아 내심 고민이었는데, 그림을 보고 나서 '아, 남의 눈에도 정말 저 정도로 보이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결국 피부과에서 인중과 턱을 영구 제모하는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친구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니, 인중의 꺼끌꺼끌한 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만 남아 있었다. 내 그림이 벌써 두 사람을 피부과로 보냈다니. 피부 클리닉과 업무 협약이라도 맺어야 하는 것인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꽃미남'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의 친구인 배질 홀워드는 도리언을 모델로 삼아 초상화를 그린다. 완성된 그림을 본 도리언은 가만히 서서 할 말을 잃는다. 그림 속에서 자기를 마주 보는 청년은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다. 저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자신이 아름답다는 깨달음이 계시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어딘가에서 '자기가 잘생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매력적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초상화를 보기 전의 도리언 그레이가 바로 그런 남자였나 보다. 그런데 기쁨으로 발그레해졌던 도리언의 뺨 위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슬픈 일이야! 나는 나이가 들어 추하고 끔찍한 모습이 되겠지! 그림속의 나는 6월의 오늘보다 단 하루도 더 나이를 먹지 않을 텐데 말이야. 반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영원토록 젊고, 이 그림이 늙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과 함께 도리언은 신비한 마법에 걸린다.그가 바란 대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자신은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초상화의 얼굴에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었다. 초상화가 존재하는 한 젊음과 아름다움은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에서 영영 떠나지 않을 터였다.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더 흉측하게 변하는 것은 초상화 속 자신이었다. 도리언 그레이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마법이 축복이 아닌 저주였음을 깨닫는다. 그는 사건의 발단인 초상화를 파괴하기로 마음먹고, 그림속 늙고 추한 자신을 향해 칼을 내리 꽂는다. 그 순간 집 안 가득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리고, 놀란 하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였다. 그 안에는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흉측한 몰골의 노인이 심장에 칼을 맞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그림 속 청년이 도리언 그레이라고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싸늘한 주검의 노인이 누구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재는 재현에 선행한다. 그러므로 재현은 실재에 근거하여 제작되고 가공된다. 하지만 이 위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오직 재현을 통해서만 실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현은 거꾸로 실재를 변형하고 조작한다. 나는 내 얼굴이라는 실재를 거울이나 카메라가 만드는 재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재현에 근거해서 표정을 바꾸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심지어 물리적인 변형도 가한다. 실재가 재현을 만들면 재현은 실재를 바꾼다. 처음 거울을 본 아기처럼,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계시'와도 같았던 자기 인식의 순간을 기점으로 도리언은 그림처럼 영원함을 유지하고 초상화는 인간처럼 나이가 든다. 실재는 재현이 되고 재현은 실재가 된다. 도리언과 초상화의 뒤바뀐 운명은 이처럼 전복과 반전을 반복하는 실재와 재현의 관계에 대한 비유가 아니었을까.
내 그림을 보고 검버섯을 제거한 할아버지와 레이저 제모를 한 친구는 '현대판 도리언 그레이'가 아니냐며 나는 장난 삼아 말하고는 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바람을 들어준 신비한 마법을 지금은 과학 기술이 대체했을 뿐이다. 피부 클리닉에서 시술을 끝낸 순간 할아버지와 친구는 자신들의 초상화보다 더 젊어졌다. 인물이 지시하는 대로 화가가 초상화를 수정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처럼 초상화를 본 인물이 자신의 얼굴을 수정하는 예도 있다. 혹자는 전자를 실재에 재현을 맞추는 것으로, 후자를 재현에 실재를 맞춫는 것으로 단순하게 비유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인물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때때로 실재의 일면을 드러내고, 인물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상은 종종 가장 허구적인 재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현실이라 정의하고, 무엇을 가상이라 정의할 것인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 딜레마의 끝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칼로 찔렀다. 그러자 자신의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왓다. 재현을 파괴하니 실재가 죽는다.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실재와 재현은 애초에 칼로 베듯이 편리하게 나눌 수 없다. 실재는 곧 재현이고 재현은 곧 실재다. 현실과 가상은 연결되어 있다. 이 단순한 명제를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초상화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지도 모르겠다.명쾌히 구분할 수 없는 두 지점 사이 어딘가에서 모호한 단면도를 제시함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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