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여인(La Vagabonde)>,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이지순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2013.

빨간차무다리아줌 2026. 1. 5. 20:56

2026년 프랑스 예술제본 비엔날레 주제 책이다. 이제 겨우 속지를 뜯었다. 삽화를 챕터 앞에 붙여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정하질 않아서 손톱 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상화님 말이, "먼저 책을 읽어야죠!" ... 그래서 읽었다. 

188쪽. 결혼이란 대부분의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를 간호사로 만들어버리는 일종의 노예화인 거죠. 결혼한다는 것, 그것은...말하자면 남편이 먹어야 할 돼지갈비가 너무 타지 않았는지 생수가 너무 차갑지는 않은지 와이셔츠의 풀을 잘못 먹인 건 아닌지 칼라가 너무 후줄근한 건 아닌지 목욕물이 너무 뜨겁진 않은지 늘 긴장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러다 결국 탐욕, 인색함, 게으름, 그런 남자의 괴상한 성격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느라 지치겠지요.

나혜석의 <<경희>>인가 싶었지만, 결혼 생활을 끝내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처지라 극장에서 판토마임 연극을 하고 춤을 추며 세상을 떠도는 현실과 직업은 없으나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귀족 남자와의 사랑 사이에서 흔들리다 결국 방랑자로 떠나는 여성의 솔직한 심리에 어느새 몰입해 읽고 있다. 이 2차원 지면의 글 내용을 어떻게 3차원 책의 형태로 구현할 것인가. 그 관점으로 눈에 들어온 문장들을 꼽아본다. 

34쪽. 낱말 하나에도 지나간 시간의 냄새와 색깔이 묻어 있다. 마치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소라고둥처럼 소리가 나고 신비하다. 

41쪽. 옅은 장미빛 안개 사이로 빛바랜 한 줄기 햇빝이 비쳐온다. 똑바로 볼 수 있을 만큼 흐릿한 태양이다. 은빛 잔디밭에선 버섯의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오른다. 제비꽃 냄새가 코끝에 스치자 달음박질로 달아오르고 바람을 맞은 내 몸이 가뿐히 나는 듯하다. 

50쪽. 내가 사는 1층은 우뚝 선 양쪽 집 사이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겨우 햇빛의 혜택을 받는다. 반짝이는 가는 빛줄기가 내 침대를 우선 비추더니 네모난 손수건만큼 커져 침대보에 장밋빛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게으르게 누워서 햇빛이 내 얼굴에 닿기를, 감겨진 눈꺼풀 너머로 눈부시게 되기를 그리고 행인의 그림자가 어둡고 푸른 날개처럼 내 위를 비추기를 기다린다. 

72쪽 어쨌든 나는 우울하고 나처럼 방랑하는 삶을 지니거나 아니면 은둔을 좋아하는 고독한 사람들이 좋다. 서로 많이 닮은 사람들이...

93쪽 방랑자, 그러나 내 친구들, 형제들처럼 언제나 제자리에 돌아오는 방랑자.... 떠나는 것은 나를 슬프게도 하고 나를 도취시키기도 한다. 내 안의 뭔가는 내가 가로지르게 되는 모든 것 -- 새로운 도시, 구름이 끼거나 청명한 하늘, 회색의 진줏빛 비가 내리는 바다 등 --에 메달리게 되고 아주 열정적으로 집착한다. 

116쪽 렌을 떠나던 어느 5월의 아침, 그 어느 날이 기억난다. 하얀 가시나무 관목숲과, 파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 장밋빛 사과나무들 하늘색 이파리의 어린 전나무들 사이로 공사중인 길을 아주 천천히 기차가 달려갔지. 

143쪽 무척 긴 머리가 발코니 밖으로 명주실처럼 흩날리고 있던 밤이...

151쪽 나는 걷고 또 걷는다... 촉촉이 젖은 제비꽃과 하얀 수선화를 가득 실은 수레 옆에 오니 향기가 무척 좋다.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눈꽃으로 불리는 스노드롭을 뿌리채 팔고 있다. 아직도 뿌리에 흙이 매달려 있고 꿀벌같이 생긴 꽃들이 줄기에 줄줄이 매달여 있네..., 오렌지 향기 같은 냄새가 나긴 나는데 너무 약해서 꼭 집어낼 수가 없군.

208쪽. ...신비로운 바람이 경쾌하게 불어오는 공원으로 나를 데려갈 때는 더욱 그랬다. 오후가 기울어갈 때면, 접시꽃빛의 안개가 산책로를 더 길어보이게 하고, 나는 도둑 키스를 한 막스에게 뜻하지 않게 찾아낸 야생히야신스를 상으로 준다. 

226쪽. 나는 떠난다. 기차 바퀴가 한 번씩 굴러갈 때마다 다리에서 멀어져 간다. 떡갈나무잎에 진주처럼 새순이 매달려 있는 쌀쌀한 봄날, 아직 안개가 겨울 냄새를 풍기는 습하고 추운 날 나는 떠난다. 

230쪽 와서는 안 돼요! 아르덴 숲이 당신 추억 속에서 내 떡갈나무 잡목림, 가시덤불, 마가목을 비웃을 테니까요.

247쪽 긴 갈대들이 사각거리며 서로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기차의 낮은 창문으로 들어오고 전나무 향기, 꿀벌 냄새, 봉오리가 벌어지기 전 백합의 쓴 향기가 테레빈 나무 냄새와 한데 섞여 풍겨 온다. 버찌나무가 벌써 가뭄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붉은 땅위로 보라빛 그림자를 드리운다. 기차가 따라가는 흰 철로 위로는 석회가루가 먼지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길가의 관목들에게 흰 분을 씌워 놓는다...

259쪽 화장을 하고 바소의 테라스에서 신선한 바람, 레몬과 홍합 내음 속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장밋빛 가로등 불빛 아래 가로수길을 따라 엘도라도로 달려간다면, 마침내 몇 시간 동안은 저 아래서 끊임없이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이 질긴 실이 끊어질지도 모르리라.

261쪽 창문 아래 뜰에는 제비꽃 화단이 아직 아침 햇살을 받지 못한 채 담홍색 미모사들 아래에서 이슬에 젖어 파랗게 질려 있었다. 

266쪽 나는 폐허가 돼버린 사원의 따뜻한 돌과 참빗살나무의 윤기 흐르는 나뭇잎들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 디안 연못 주변에는 언제나 유대나무와 테레빈 나무, 잣나무, 보랏빛 꽃이 피는 오동 나무, 자주빛 찔레 나무 그림자가 가득하다. 정원의 모든 그림자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어두운 남색과 빛바랜 보라색, 혹은 검은 갈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물웅덩이 밑으로 분해된다. 

269쪽. 게으르고 향기로운 빗방울을 한 방울씩 뿌리며 검은 먹구름이 머리 위로 지나간다. 빗방울 하나가 내 입가에서 별모양으로 부서진다. 나는 황수선화 맛이 나는 미지근하고 먼지 섞인 그 빗방울을 마신다. 

283쪽. 겁이 많은 봄이 우리 앞에서 도망간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봄이 점차 젊어지고 나뭇잎들, 꽃잎들이 점점 웅크리고 있다. 산울타리 나무의 연약한 그림자 아래로 4월의 데이지꽃과 제비꽃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쪽빛 창공과 키가 작은 풀, 황산 냄새가 풍기는 공기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환상을 안겨주면서...

285쪽 기차가 가로지르는 작은 간이역마다 브르타뉴 지방의 특산품인 흰 모자가 데이지꽃처럼 피어 있다. 기차가 금작화와 가시양골당초들이 가득한 노랑의 제국으로 들어서자 너무나 눈이 부셨다. 황금색, 구리색, 주홍색이 한데 어우러져 찌르는 듯한 빛으로 척박한 광야를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296쪽 나는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지요. 내가 아직 당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걸. 자유롭게 떠돌면서도 나는 때때로 당신이라는 벽의 그늘을 그리워할 테지요....스러졌다 다시 피는 꽃처럼, 피가 온몸으로 솟구쳐 흐르며 백단향과 갓 벤 풀냄새가 진동하는 기쁨도...아! 당신은 오랫동안 내 길 위의 꺼지지 않는 하나의 갈증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